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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임의 시조 읽기 4】김정숙의 '다음 지구'

다음 지구 김정숙 잘 먹고 잘살려고 선택한 건 결코 아니다오른 만큼 흔들리는 불안의 가지 끝에단둘이 살을 맞대고 젖기만 하는 달팽이 안개 속에 휘 묻혀 감각을 팔았을까호르몬 링거 맞으며 헛꽃으로 환한 정원물 먹어 손 놓은 수국 분홍 파랑 틈에서 각자 집 지고 살아도 지금 좋다는 생명체피운 지 며칠 됐다고 변하는 꽃말에 표류하여더듬이 가다듬는 생 암수한몸이면 어때요 《제주시조 제33호》 (열림문화. 2024) 시(詩)는 일정한 형식을 갖춰 통합된 언
2025.03.12 23:41

[시 해설] 이성열의 "하얀 텃세"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3 ]하얀 텃세 이성열 “값 깎으려면 당신 나라로 가서나 깎아!”파머스마켓에서 과일을 집고 우수리 좀 깎으려니배불뚝이 중년의 백인 남자가 무뚝뚝하게 내뱉는다“당신도 그럼 당신 나라로 돌아가!”“여기가 내 나라야!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나도 여기가 내 나라야! 나도… 세…, 세금을 내니까…가만, 아마도 당신은 여기서 태어났을지 모르지하지만 당신 아버지, 또 할아버지는나처럼 어디선가 이리로 왔을 것 아니야?” 그들은 나를
2025.03.12 23:35

[Sonnet] DESTINY _ Michael K

Congrats, Ryu Ahn, ON YOUR LAUNCH OF KORAE ART NEWSDESTINY Michael K Thou wert drawn to the universeI was drawn to the verse Capturing images in the universe on canvasCrystallizing pages in the verse on humusWill thy painting last eternal in speech?Shall
2025.03.11 21:11

[시 해설] 권달웅의 "고삐"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2] 고삐 권달웅 아슴푸레해지는 해거름이면 넓은 들녘에는 워낭소리가 퍼졌다. 해종일 부리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한 황소의 고삐를 잡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등 뒤에는 휘어진 초승달이 멍에처럼 걸려 있었다. 아버지가 소를 팔러 갈 때면 꼭 나한테 고삐를 잡게 했다. 신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농사짓는 소를 팔아야 하는 억장 무너지는 가슴을 내가 알도록 함이었을까. 아침부터 우시장 말목에는 먼저 와 매인 소들이 웅성거리고 있
2025.03.11 15:52

[시 해설] 민윤기의 "어.머.니."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1] 어.머.니. 1―1950년 9월 민윤기 네 살 때였을까 엄마 젖이 먹고 싶었을까엄마! 하며 밥 짓던 어머니 부르며부엌문 열었을 때어딜 들어와! 때릴 듯 부지깽이 쳐들고화난 표정으로 노려보시던 어머니! 내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엄마 모습이다 육이오 동란통에흑백사진 한 장 남기고죽은 어머니어머니어… 어.머.니. 2―1953년 4월 여덟 살 때였다 국민학교 1학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 년 만에 면례緬禮를 했다전쟁통에 채
2025.03.11 00:51

[시 해설] 박재화의 "현수막 거는 사람 1"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10]현수막 거는 사람 1 박재화 매주 전단지 4,000장을 돌렸다현수막은 달마다 300개를 걸었고주말이면 서울은 물론 전국을 돌았다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서울대를 가고 싶어 하던 소녀가 깜쪽같이 사라진1999년 2월 13일 밤 모든 것이 멈춰서고 사라졌다여고생이 평택 도일동 막차에서 내렸을 때남은 승객 30대 남성도 따라 내렸다는데단순가출이라며 경찰은 사흘 뒤에야 움직였다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어디서도 혜희 소식은 날아
2025.03.10 02:43

[시조 감상] 이병기의「오동꽃」

[신웅순의 명시조를 찾아서 2] 오동꽃 / 이병기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한 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 가람 이병기의「오동꽃」 담 머리 넘어드는 은은한 달빛. 한 두 송이 오동꽃이 소리 없이 지고 있다. 가려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한 장면의 흑백 필름. 이보다 정겨운 한국적인 정서가 어디 있을까. 봄비도 에돌아가고 설움도 지나쳐가는 담장길, 어느
2025.03.09 10:01

[동시 해설] 장세정의  "호랑이 등"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9]호랑이 등 장세정 엄마는 꿈에 호랑이가 찾아왔다고 했다일하던 분식집 앞에서 호랑이가 등을 내밀었고엄마는 넙죽 올라탔단다.―겁쟁이가 어떻게 호랑이 등에 탔어?엄마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주렁주렁 매달린 주삿바늘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거야?―드디어 고통을 용기로 바꾸는 열쇠를 얻게 된 거야?속으로만 조심스레 묻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엄마는 정말로 가 버렸다엄마의 사진은 분식집을 한 바퀴 돌았고나는 엄마가 처음
2025.03.08 22:25

[시조 해설] 박수근의 "일용엄마"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8] 일용엄마―배우 고 김수미 님 영전에 올립니다 박수근 허름한 몸빼 바지양장보다 더 어울려 동네방네 사사간건안 낀 일이 없었던 초광역오지랖 넓은일용엄마 울엄마 틀에 짜인 드라마는하릴없이 끝났지만 눈물 배고 땀이 밴인생 2막 그 무대 양촌리넘너른 벌판보름달로 오소서 ―『정형시학』(2025년 봄호)에서 [해설] 일용엄마를 기리는 시조 원로 배우 김수미 씨가 2024년 10월 25일에 별세했다. 향년 75세. 1971
2025.03.07 23:38

[시 해설] 이호석의 "고양이 제사"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7 ]고양이 제사 이호석 우리 집 어딘가에 고양이 식구가 살고 있었대요. 어느 날 고물 더미 쌓인 담벼락에서 며칠째 새끼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어미가 새끼를 물고 담벼락에 오르다 놓친 것 같았대요. 그러자 잠을 설치는 통에 귀찮았던 아들은 이렇게 말했대요. 새끼 고양이가 배고픈 거 같은데 우유 좀 사다 주세요. 그래서 새끼 고양이를 구해 주려 했지만 꼭꼭 숨어 버려 나오지를 않았대요. 할 수 없이 당신이 먹다
2025.03.07 00:47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6 ] 여태동의 "땅강아지"

땅강아지 여태동 6월 가뭄이 기승을 부리던 날감자를 캤다물기 한 점 없는 감자애타는 농심처럼 고슬고슬했다 올 4월 1일 싹이 난 감자를 심으며장마가 오기 전에 수확하겠다고다짐을 했던 게 주효했다 호미를 넣어 알을 꺼내다가어릴 적에 봤던 땅강아지와 마주쳤다동그랗게 파먹은 감자 구멍에서더위를 피하고 있는 앙증스런 땅강아지 열심히 키워놓은 감자를이 녀석과 굼벵이가 파먹었다이상한 사람 만났으면넌 벌써 이 세상 땅강아지가 아니었다 흔들어도 아무 기척이 없다애시당
2025.03.06 00:38

[강영임의 시조 읽기] 박명숙의 '적벽'

적벽 박명숙 성냥불 타들어가듯 물빛 홀로 꼬부라지는데정강이 일으켜 세우고 적벽이 건너온다징검돌 하나씩 버리면서 저벅저벅 건너온다 어둠살 들이치는 물결과 물결 사이로금천강 저녁답 실핏줄을 터뜨리며적벽이 물 건너온다 들소처럼 건너온다 해거름 물소리는 솔기마다 굵어지는데성미 급한 어둠을 한 걸음씩 들어올리며핏물 밴 적벽 한 채가 철벅철벅 건너온다 『맹물 같고 맨밥 같은』 (고요아침. 2022)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학습서나 학술서도 그렇지만
2025.03.06 00:18

[시 해설] 김광림의 '괜한 소리'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5 ]괜한 소리 김광림 혈압 때문에 술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한 중학 동창은마지막 대작을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았단다반세기가 넘어도 상기 ‘야’ ‘자’로 통하는 사이가마냥 즐겁기만 하다.한때는 혀가 굳어져 제대로 말도 못했다며다시 굳어지기 전에 꼭 해야겠다고느닷없이 들고나온 한마디—야, 너 집 떠날 때 아버지한테 얘기했니?국회 청문회인들 이보다 더 가슴에 맺힐까간신히 기어드는 목소리로—아니라고 대꾸하긴 했지만금방 가슴속의 응어
2025.03.05 00:22

[동시] 노을 길 _ 성명진

[이승하 시인의 하루에 시 한 편 2 ] 노을 길성명진옆집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한사코업으려 하고 있었다아버지랑 함께길모퉁이를 도는데“누가 보면 어쩌려고.”“저기까지만 업혀.”다리를 두드리면서도 마다하는할머니 앞에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어두워지려다 잠시 환해진 저녁 세상아버지가 나에게 고갯짓했다우리는 살금살금 물러나다른 길로 돌아서 갔다―『밤 버스에 달이 타 있어』(창비, 2025)에서<해설> 이 동시 속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몇 년을 해로한 것일까
2025.03.02 01:20

[시조] 최남선의「혼자 앉아서」

[신웅순의 명시조를 찾아서 1 ] 가만히 오는 비가낙수져서 소리하니오마지 않은 이가일도 없이 기다려져열릴 듯 닫힌 문으로눈이 자주 가더라 - 최남선의 「혼자 앉아서」가만히 오는 비가 뚝욱 뚝뚝 낙수져서 소리한다. 오지도 않는 이인데도 일도 없이 기다려진다.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간다는 것이다. 농촌에선 비가 오는 날이면 공치는 날이다. 비가 꽤 온다. 밭에 풀을 매러 가야하는데 나갈 수가 없다. 오늘 매지 않으면 풀들이 수북이 애기키만큼 자랄
2025.02.27 10:09

[강영임의 시조 읽기]

별똥별 하나김윤숙 어둠이 저를 낮춰남은 숨 몰아쉴 때 신성의 입구부터빛나던 낙타가시풀우리는 외길 위에서 어디에 있었던 걸까 유목의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답신 같은 전언 같은그 음성 들었는지 순식간 감전된 하늘귀울음 저릿하다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2024) __________________________“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에 나오는 시구(詩句
2025.02.27 02:42

[풍경이 있는 시심 1]   겨울연서 _ 지희선

겨울 연서 지희선 창밖엔 겨울 빗소리 내 맘엔 네 목소리 종점으로 이어지는 동그란 웃음 소리 안녕도 못한 아린 이별 이리 길 줄 몰랐지
2025.02.21 20:03

[강영임의 시조 읽기] 봄 그림자 _ 이화우

봄 그림자 이화우그 비백 뒤꼍에서 문득 간 꽃잎들이던져버린 향기로 썩지 않고 쟁쟁하다 구멍집 어둠 속에도 메아리가 누대 산다 『먹물을 받아내는 화선지처럼』 (가히.2024) 봄은 알 수 없다. 기후 위기로 1년에 네 번씩 꽃 올리는 자목련, 겨울인데도 얼굴 내민 개나리 등 꽃 피고 잎 지는 때가 제 각각이다. 사계절은 고유한 빛과 냄새가 있는데 그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않다. 바람 불면 흔들리는 나무들은 초록을 내뿜었고, 꽃들이 수런거리
2025.02.21 16:28

[기고] 동면 _ 강영자

눈은 소리 없이 내려와길 위의 흔적을 덮어 가고굴뚝 연기는 하늘로 번지며겨울을 따스하게 감싸지만 그러나 이 밤돌아갈 집 없는 한 사람이찬 바람 속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그에게 겨울은 너무 길었고눈은 이불이 되지 못했다 나무 타는 향기마저 닿지 않는 곳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어 사라지고하얀 설국 아래그리운 온기가 되었다눈은 여전히 내리고도시는 모른 척 잠이 든다그러나 봄이 오면이름 없는 그를 위해가장 따뜻한 햇살이 내릴 것이다
2025.02.21 11:08

[초대시] 등  _이승하

아버지가 아들의 등을 본다잠자는 꼽추내가 너를 이렇게 낳았구나 아들이 어머니의 등을 본다지팡이 짚은 꼬부랑노인저 때문에 허리가 기역 자로 굽었지요 아들 등을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어머니 등을 몰래 한번 쓸어본다따뜻한 등이 밝은 등이 되는 순간 ㅡ『생애를 낭송하다』(천년의시작, 2019)에서
2025.02.16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