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07] 랭보의 "고아들의 새해 선물"
고아들의 새해 선물
LES ÉTRENNES DES ORPHELINS
아르튀르 랭보
Ⅰ
방은 어둠이 그득하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두 아이의 슬프고 나직한 속삭임.
그들의 이마는 수그러져 있다, 아직도 꿈의 무게에 눌려,
떨리며 걷히는 희고 긴 커튼 자락 아래서……
―밖에서는 새들이 추워 서로 몸을 붙이고 있다.
그 날개는 하늘의 잿빛 색조 아래서 마비되어 간다.
그리고 새해는, 안개에 싸여,
눈같이 흰 드레스 자락을 이끌며,
눈물과 함께 웃고, 추위에 떨며 노래한다……
Ⅴ
이제, 어린것들은 슬프게 잠들어 있다.
보면, 그들은 자면서도 울고 있는지,
눈은 부어 있고 숨결은 고통스럽구나!
어리고 어린것들의 가슴은 이토록 여리구나!
―그러나 요람의 천사가 다가와 그들의 눈을 닦아주고
이 무거운 잠 속에 즐거운 꿈 하나 가져다 놓는다.
아주 즐거운 꿈이어서, 반만 오므린 아이들의 입술이
미소 지으며, 무언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꿈꾼다. 그 작고 동그란 팔에 엎드린 채,
부드럽게 깨어나는 몸짓으로, 이마를 내밀고는,
몽롱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꿈을……
그들은 어느 장밋빛 낙원에서 잠든 것으로 믿고 있다……
불빛 그득한 화덕에서 불꽃이 흥겹게 노래하고……
창문 너머 저기 맑고 푸른 한 조각 하늘이 보인다.
자연은 깨어나 햇살에 취하고……
대지는, 반쯤 헐벗은 채, 소생의 행복에 젖어,
태양의 입맞춤으로 환희에 전율한다……
오래된 집 안에 모든 것은 따뜻하고 진홍빛이다.
어두운 옷들이 이제 바닥에 널려 있지 않고,
문턱 아래 삭풍도 마침내 입을 다물었다……
어느 요정이 거기 들어온 것 같구나!……
―아이들은, 아주 기뻐하며, 두 번의 소리를 지른다……
거기 엄마의 침대 곁, 한 줄기 장밋빛 아름다운 광선 아래,
거기, 넓은 융단 위에, 무언가 빛나고 있다……
그것은 광택이 반짝이는 자개와 흑옥(黑玉)의,
검고 흰, 은도금의 메다용들,
작고 까만 액자들, 유리 화관들,
금자로 두 마디 새겨져 있다. “우리 어머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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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 『나의 방랑』, 한대균 역, 문학과지성사, 2014.
[해설]
오늘은 새해 첫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전화로, SNS로, 각종 단톡방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을 열 번쯤 할 것이고 스무 번쯤 들을 것이다. 새해가 되면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손쉬운 이 인사를 하는 것인데, 말 속에 대단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새해에는 무병ㆍ무탈하고, 뜻한 일들이 잘 풀려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타인의 안녕과 건강을 희구하는 말이다. 새해에는 문학을 좋아하는 여러분들에게 문학 관련 희소식이 들려오기 바란다.
이 시를 1854년 10월 20일에 태어난 아르튀르 랭보가 쓴 것은 1869년이었고 발표한 것은 1871년 1월 2일자 《만인의 잡지》였다. 일종의 등단작이다. 15세 때 쓴 것이다. 제1장은 짧지만 2, 3, 4, 5장이 다 꽤 길다. 제1장과 마지막 장만 실었다. 랭보는 유년시절이 꽤 불행하였다. 40세의 육군 대위와 29세인 농촌 출신의 엄격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랭보가 여섯 살 때 부모가 성격차로 이혼하였다. 어머니는 막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낡고 작은 집으로 이사한다. 랭보는 후일 가출을 거듭하는 반항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데 어머니의 엄격하고 독선적인 성격이 싫었기 때문이다.
랭보는 나보다 더 불행한 내 또래, 그리고 더 어린 꼬마들이 보육원에서 새해 아침을 맞을 것을 생각하고는 그 아이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펜을 들었다. 새해 설날이 다가오자 이날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아플 그곳의 아이들을 생각해보았다. 프랑스에서는 새해 첫날 아침에 뭘 먹는지 모르겠지만 부모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고아들을 생각해 이 시를 쓴 것이다. 제2, 3, 4장은 부모가 돌아가셔서 고아가 된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가 (혹은 부모 중 한 사람이) 보육원에 자식을 맡긴 경우를 시에서 다룬다. 아이들은 “우리 엄마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실까?” 하고 중얼거린다. 랭보는 그런 아이들이 꿈속에서나마 엄마를 만날 수 있게끔 환상적인 공간을 만들어 제공한다. 자면서도 우는 아이들이 어느새 “불빛 그득한 화덕에서 불꽃이 흥겹게 노래하고……/ 창문 너무 저기 맑고 푸른 한 조각 하늘이 보인다.”고 하니 그 세계는 흡사 천국 같다. 다들 엄마를 곧 만나게 될 거라 꿈속 세계의 요정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마련해 주었다. 엄마에게 드릴, 금으로 새긴 글자에는 “우리 어머니에게!”라고 새겨져 있다.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 살기를 바란 랭보의 갸륵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그 시를 열다섯짜리가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랭보는 열일곱 살 때부터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열아홉 살 때까지만 쓰고 붓을 완전히 꺾고 1891년 37세로 사망할 때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지를 떠돈다. 천의무봉인 그의 시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간 파란만장한 생애에 매료된 나는 오래전에 절판된 책인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에서 31쪽에 걸쳐 그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다루었다.
오늘 3만 5천 명이 넘는 탈북인들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할 것이다. 보육원과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은 더욱더 외로워할 것이다. 이 사회의 응달에 있는 사람들이 2026년에는 환한 햇살 아래로 나와서 기지개를 맘껏 켰으면 좋겠다. 시인의 생애 대신 졸시의 후반부를 적어본다. 그의 생애를 동경해 집을 나가 떠돌며 오래 학교에 가지 않아 나는 고1 때 퇴학을 당했다.
멍청한 애늙은이 베를렌의 유혹을 뿌리치고
취한 배에 몸을 실어 머나먼 서인도제도로
침묵하는 호수와 우울한 숲이 있는 스칸디나비아반도로
사막의 선인장이 비를 기다리는 이집트로
공사판의 십장이 되어 키프로스 섬으로
무기 밀매상이 되어 예멘의 항구도시 아덴으로
우와, 백인이 단 한 명도 발 들여놓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오지 오가덴 지방으로!
저 길,
가고 싶은 지금 즉시 가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산 주검이 아니면 죽은 목숨인 것을
나는 이제껏 지옥에서 사계절을 났으나
지글지글 들끓는 내 마음 같은 적도의 태양
선명한 북반구의 별자리들과 몰약같이 황홀한 오로라
뱃길을 가로막고 쉬어 가라 유혹하는 저 자옥한 해무海霧가
다 내 것이다…… 나의 것, 나의 천국!
―「천국의 랭보」 후반부(『사람 사막』, 더푸른, 2023)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