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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15] 이정란의 "나는 있다"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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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다

 

이정란

 

땅 어딜 밟아도 벨이 울렸어

어딜 파도 까만 씨앗이었어

 

새싹은 지축을 흔든 후 혼돈에 빠졌지

 

말발굽이 지나가고 떨어져 나간 목에

뒤엉킨 천둥벼락의 뿌리가 돋아났어

 

새끼 고양이의 이빨 같은 백설이

무한으로 꽉 찬 세상의 난청을 녹여주었지

 

영원을 사는 신의 이야기가 까무룩 낮잠이란 걸 알게 된 건

미지의 불 한 덩이 덕분이었어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하늘은 마음을 펼칠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

 

미래의 옆구리에서 떨어진

내 몸은 신의 언어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 닿고

 

비어 있음으로 시작되는 중심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

 

무심히 지나가기만 해도 튀는 시간에 휘청이며

 

—『나는 있다』(여우난골, 2023) 

이정란 시인
이정란 시인

  [해설]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올 때

 

  ‘이승하 교수님께 20241월 새날 이정란 드림이라고 사인이 되어 있는 시집을 받은 것은 적혀 있는 그대로 2024년 연초였다. 시집의 표제시를 읽고 왜 이렇게 시가 어둡지? 요즈음 신상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하고 생각하였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편 거의 대다수가 암울하였다. 비극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고, 현재를 비관하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전망도 암담하였다. 이 모든 시편이 암투병을 하면서 쓴 것인 줄 그때는 알 수가 없었다. 영혼의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을 무렵, 이정란 시인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태우면서 시를 썼다. 내가 암 선고를 들었다면? 이렇게 치열한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머잖아 죽을 걸 알지만 지금은 살아 있다. 의식도 멀쩡하고 몸도 움직일 수 있다. 다만 목숨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유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절대권력자의 권력도 유한하고 왕후장상의 부귀영화도 유한하다. 시인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영원을 사는 신을 생각한다. 이 시에 나오는 은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나 신약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아니다.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고 할까.

 

  시인은 자신의 죽음을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라 하였다. “나는 지금 수십 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인데 내 사후에 전개될 태양계의 운명, 세계의 평화, 지구 온난화, 문단의 권력, 나의 명성…….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한다는 신도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다.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 닿을뿐이다. 시인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뚜렷한 명제 앞에서 튀는 시간에 휘청이며 지금 살아 있고, 살아 있으니 시를 쓰는 것이다. 시작행위만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행위이다.

 

  이정란 시인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였다. 서정주나 구상 같은 스승이나 임영조ㆍ김형영ㆍ송기원 같은 학과 선배님의 장례식장에 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 제자의 장례식장에 갈 때였다. 금은돌, 이윤설의 장례식장에 가서는 너무나 비통하여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이정란 시인과 동문수학한 고광식ㆍ김지호ㆍ김효숙(평론가)ㆍ배우식ㆍ양해기ㆍ이동화ㆍ이영숙ㆍ정금희ㆍ최휘 시인 등과 함께 여러 차례 만나 함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했는데 제자의 부고를 접하고 보니 내가 너무 오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상투적인 말을 하는 대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생로병사의 비의를 골똘히 탐색한 아까운 제자의 시집을 읽도록 하겠다.

 

  [이정란 시인]

 

  2025912일 향년 67세로 작고한 시인은 1999년 《심상》으로 등단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이를테면 빗방울』『눈사람 라라』『나는 있다』와 산문집 『간이역』을 발간하였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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