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74] 김강호의 “봄이 쓰는 문장”
봄이 쓰는 문장
김강호
탄환처럼 날아와 박힌 외마디 꿩 울음에
소스라쳐 놀랐는지 눈을 번쩍 뜨는 나무들
겨울을 눈물겹게 벗긴
피멍 든 봄 손톱 보네
초록빛 끌어다 놓고 몸져누운 햇살과
연약한 꽃 대궁이 피워올린 노래와
살찐 강 은빛 등에서
돋아나는 비늘 보네
가야 할 문장의 길 마침내 찾아낸 듯
매서운 붓을 쥐고 달려드는 바람의 손
간담이 서늘하도록
흘림체로 내달리네

「봄이 쓰는 문장」은 봄을 시인으로 의인화하여, 겨울의 폐허 위에 새로운 생명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과정을 형상화해 보았다. 이때 ‘문장’은 단순히 계절의 풍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 상처와 회복, 침묵과 생성이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기록이다. 봄은 자연에 찾아오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세계가 다시 자신을 써 나가는 주체가 된다.
첫 수에서 “탄환처럼 날아와 박힌 외마디 꿩 울음”은 봄의 도래를 알리는 생명의 신호이면서, 동시에 정지해 있던 세계를 깨뜨리는 하나의 ‘문장 부호’와 같다. 꿩의 울음은 겨울의 침묵을 관통하는 탄환처럼 날아와 박히고, 그 충격에 “눈을 번쩍 뜨는 나무들”은 잠들었던 생명이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봄의 탄생은 마냥 환하고 평화롭지 않다. “겨울을 눈물겹게 벗긴 / 피멍 든 봄 손톱”이라는 표현에서 봄은 겨울이라는 낡은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상처를 감수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여기서 ‘피멍 든 손톱’은 생명이 탄생하기까지 치러야 하는 고통의 흔적이자, 생명은 상처를 통과해서만 자신을 갱신할 수 있다는 역설이다.
둘째 수에서는 봄이 써 내려가는 문장을 더욱 풍성한 생명의 이미지로 확장시켰다. “초록빛 끌어다 놓고 몸져누운 햇살”은 햇살을 붓으로 삼아 세상에 초록의 색을 입히는 봄의 창조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연약한 꽃대궁이 “피워올린 노래”와 “살찐 강 은빛 등에서 / 돋아나는 비늘”은 서로 다른 생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드러내는 모습이다. 특히 강물의 “은빛 등”에서 돋아나는 비늘은 강을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바라보게 하며, 자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꽃은 노래하고, 강은 비늘을 돋우며, 햇살은 초록을 끌어다 놓는다.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고 쓰고 움직이는 하나의 주체로 본 것이다.
마지막 수에서 봄은 마침내 “가야 할 문장의 길”을 찾아낸다. 그리고 “매서운 붓을 쥐고 달려드는 바람의 손”을 통해 봄의 문장이 절정에 이르게 하였다.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봄이 세계를 써 내려가는 붓이 된다. 바람의 손이 “간담이 서늘하도록 / 흘림체로 내달리”는 모습은 봄의 생명력이 부드러운 정적인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때로는 거칠고 급진적인 힘으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흘림체’는 일정한 틀에 갇히지 않는 생명의 자유로운 운동이며, 자연이 스스로 써 내려가는 예측할 수 없는 문장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봄은 겨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단순한 계절이 아니다. 봄은 상처를 딛고 다시 자신을 써 나가는 생명의 의지이며, 세계가 소멸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힘이다. “탄환”, “피멍”, “붓”, “흘림체”라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수렴시킨 것이다. 봄이 쓰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바람과 햇살과 꽃과 강물이 함께 써 내려가는 현재진행형의 문장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봄의 진정한 의미는 꽃이 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세계가 다시 한 줄의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