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평화의 길을 걷다…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며
2026년 9월 9일, 강원도 고성 DMZ 평화의 길 A코스를 걸었다.
전날 고성 일대에는 많은 비가 내렸다. 이날 역시 비 예보가 있어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고성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서 필요한 수속을 마치고 거진검문소를 지나는 순간, 평소 여행길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긴장감이 밀려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는 자유롭게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검문소를 지나면서부터 눈앞의 풍경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70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분단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했다.

고성통일전망대에 도착해 차량을 주차한 뒤 약 10분을 걸어 DMZ 평화의 길 A코스 집결지로 향했다. 여름철 미개방 기간을 지나 이날이 A코스 개방 첫날이었다. 탐방객은 불과 5명. 오히려 현지 안내자와 안전요원, 군 경비 인력이 탐방객보다 많을 정도였다. 적은 인원이어서인지 안내자의 설명을 가까이에서 들으며 보다 차분하고 깊이 있게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북녘의 금강산과 해금강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감탄보다 먼저 시선이 향한 곳은 동해바다가 보이는 곳에 이중으로 설치된 철책이었다.
저 멀리 산 위에는 초소가 보인다. 남쪽의 초소와 북쪽의 초소가 한 공간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산과 바다와 하늘은 어느 곳에도 경계를 만들지 않았지만 인간은 그곳에 철책을 세우고 초소를 만들었다.
자연은 하나인데 사람의 땅은 둘로 나뉘어 있었다.
DMZ 평화의 길 A코스는 왕복 약 3.6㎞다. 반환점은 남방한계선이다. 걷는 길 오른쪽으로는 동해가 펼쳐져 있었다. 전날 내린 비의 영향인지 바다는 잔잔하지 않았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부서지고, 다시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런 거친 바다와 달리 길가에는 노랑나비가 한가롭게 날고 있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 철책과 군사시설 사이를 날아다니는 작은 나비의 모습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인간은 수십 년간 이곳을 경계하고 무장했지만 자연은 인간이 만든 군사분계선을 알지 못한다. 나비에게 남과 북은 없었다.
그러나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현실은 다시 엄중하게 다가왔다.
탐방로 가까운 곳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지뢰 표식이 이어졌다. 우리가 걷는 길은 안전을 확보해 개방한 탐방로이지만 철책 너머에는 여전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다.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과 지뢰 경고 표식이 한 장소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이곳이 가진 역설을 보여준다.

멀리 구름 사이로 금강산 외금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쪽으로는 금강산 구선봉과 해금강이 이어졌다.

눈으로는 너무나 가까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고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갈 수 없는 곳이다.
가까이 보이기에 오히려 더욱 멀게 느껴졌다. 갈 수 없는 땅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약 50분을 걸어 반환점인 남방한계선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하는 지금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가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진입(접근)하고 있는 중임.”
표지판 하나가 우리가 서 있는 장소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관광지 안내판이 아니다. 지금도 유효한 군사적 경계의 표시다.

탐방객들은 현지 안내자의 설명을 들은 뒤 각자 사진을 남겼다. 나 역시 그 앞에 섰다. 평소라면 여행지의 인증사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에서의 한 장은 의미가 달랐다. 내가 서 있는 바로 앞은 남방한계선이고, 그 너머는 마음대로 걸어갈 수 없는 땅이었다.
더 가슴을 무겁게 만든 것은 주변의 끊어진 길이었다.
한때 남북 화해와 교류의 상징이었던 도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 멈춰 있었고, 철길 역시 녹슨 채 남아 있었다. 사람과 물자가 오가고 남북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길이다. 길은 만들어졌지만 사람이 갈 수 없고, 철길은 놓였지만 열차는 달리지 못한다. 끊어진 도로와 녹슨 철길을 바라보며 한반도의 지난 시간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2026년은 정전협정 체결 73년이 되는 해다.
73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의 생애에 가까운 긴 세월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쟁은 법적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정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 DMZ에 서면 ‘정전’이라는 단어가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철책이 있고,
지뢰가 있고,
초소가 있고,
허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땅이 존재한다.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산과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그곳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평소 분단을 얼마나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면 분단이라는 현실은 때때로 뉴스 속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DMZ 평화의 길에서는 그것이 눈앞의 현실이 된다.
철책 한 줄이 사람의 이동을 막고 있다.
산 위의 초소는 서로를 감시한다.
도로는 끊어져 있다.
철도는 멈춰 있다.
그리고 땅속에는 아직도 지뢰가 남아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지금도 전쟁과 무력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을 먼 나라의 비극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DMZ에 서면 질문이 달라진다.
과연 우리는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DMZ의 철책은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게 한다.
평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고,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며, 철책과 지뢰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상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DMZ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은 특별하다.
그곳에는 아직 철책이 존재하고 군인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으며 출입도 제한된다. 역설적으로 가장 평화롭지 못했던 장소에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이 단순한 관광코스의 명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철책을 걷어내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만도 아니다. 오랜 분단 속에서 쌓인 불신과 적대감을 줄이고, 상대를 다시 사람으로 바라보며, 전쟁이 아닌 대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 전체가 ‘평화의 길’일 것이다.
그 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화려한 금강산도, 거친 동해의 파도도 아니었다.
철책 옆을 날아다니던 작은 노랑나비였다.
사람은 땅에 선을 긋고 철책을 세웠지만 나비는 자유롭게 날았다. 바람도 남방한계선에서 멈추지 않았고 구름도 군사분계선을 피해가지 않았다. 파도 역시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았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경계는 너무나 인위적인 것이었다. DMZ를 걸으며 다시 생각했다.
평화는 거대한 정치적 구호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분단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는 것,
서로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전쟁이 아닌 평화의 가치를 전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평화의 길을 걸었다면 우리는 몇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전쟁은 결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평화는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평화 역시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오늘 내가 반환점에서 발길을 돌렸던 남방한계선을 지나 더 북쪽으로 계속 걸어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금강산을 망원경이나 철책 너머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길을 따라 직접 찾아갈 수 있는 날. 녹슨 철로 위로 다시 열차가 달리고, 끊어진 도로에 차량이 오가며, 남과 북의 사람들이 검문과 긴장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는 날.
그날이 온다면 ‘DMZ 평화의 길’은 더 이상 분단의 경계를 체험하는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남과 북을 잇는 길이 될 것이다.
2026년 9월 9일.
나는 DMZ 평화의 길 A코스를 걸었다.
3.6㎞ 남짓한 짧은 길이었지만 그 길에서 마주한 시간은 70년이 넘는 분단의 역사였다.
철책 너머로 금강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평화는 기다린다고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하고, 지켜야 하며, 다음 세대에게 이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직접 걸어서 완성해야 할 길이다.
그것이 오늘 이 평화의 길을 걷고 돌아온 사람이 기억해야 할 일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글 l 임만택 한국아트넷뉴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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