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93] 구상의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
구상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을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복지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도형수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시킬 자유만이 있다는 말일세.
빠삐용! 이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드레퓌스의 벤치에서』(고려원, 1984)

[해설]
자유와 속박의 차이
1973년에 만들어진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란 사람이 쓴 자전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것으로, 절반 정도는 사실이요 절반 정도는 허구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빠삐용 역을 스티브 맥퀸이, 루이 드가 역을 더스틴 호프만이 맡아 두 사람 다 명연기를 했다. 루이 드가는 샤리에르가 책을 쓰면서 내러티브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구상 시인은 이 영화를 보고 와 펜을 드는데, ‘죽음의 섬’을 아홉 번째 탈출하여 성공하는 빠삐용을 배웅하는 루이 드가(시인은 ‘짱’이라 이름을 붙임)가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했을 거라 상상하여 시를 써 내려간다.
빠삐용은 코코야자 자루가 구명보트 역할을 해줄 거라 믿고 바다에 뛰어들지만 탈출에 성공할 확률은 0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래도 빠삐용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물론 자유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지만 루이 드가는 애써 찾은 그 자유가 또 나를 구속할 거라고 생각한다. 돼지 200마리를 키우는 것이 이곳에서의 내 소임인데 바깥세상에서 내가 직업을 구한다 해도 또 이런 일일 테니까 구태여 목숨을 내버릴 수 있는 모험에 나서지 않은 거라고 자기변명을 삼는다. “그래서 자네가 찾아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라는 말을 속으로 뇌까리면서.
루이 드가의 생각은, 아니 시인의 생각은 자본주의사회 혹은 세속사회에서의 삶이라는 것이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이를 쳐야 하므로 창살과 쇠사슬이 있는 유형지라는 것이요, 현대인들이 알고 보면 모두 도형수라는 것이다.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로 삼고 여러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시킬 자유만이 있다”고 하는 루이 드가의 생각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고 돼지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도록 한다.
나무위키에서 실존인물 앙리 샤리에르의 인생 후반부를 가져온다.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높은 감옥섬에 갇힌 후 1941년 샤리에르는 악마의 섬의 높은 절벽에서 던진 코코넛 주머니들이 일곱 번째 파도마다 강력한 해류의 힘을 받아 육지 쪽으로 세게 떠내려간다는 것을 발견하고 코코넛 주머니를 이용한 뗏목을 타고 또 다른 한 명의 죄수 실뱅(Sylvain)과 함께 악마의 섬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다. 프랑스령 기아나에 온 이후로 여덟 번째 만에 성공하였다. 며칠을 표류하여 육지에 도달하지만 실뱅은 퀵샌드(quicksand)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샤리에르는 그곳에서 탈옥하여 움막을 짓고 지내던 퀵퀵(CUic Cuic)이란 자를 만나 같이 보트를 사서 브리티시 기아나(현재의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에 당도한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낸 후 또 다른 탈옥 죄수들과 함께 새 보트를 사서 브리티시 온두라스(현재의 벨리즈)를 목적지로 하고 항해하다 사이클론을 만나 베네수엘라에 도착하게 된다. 베네수엘라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샤리에르는 1944년 석방되어 베네수엘라에서 바텐더, 레스토랑 주인, 나이트클럽 매니저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1956년 베네수엘라 시민권을 얻는다. 1968년에 자전소설 『빠삐용』을 몇 달에 걸쳐 쓴 후 출판하고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기고 지내던 중 1973년 후두암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프랑스의 자기 고향 마을에 묻혔다.”
[구상 시인]
노벨문학상 본선 심사에 두 번 올랐던 구상 시인의 시는 프랑스·영국·독일·스웨덴·일본·이탈리아어로 출판돼 널리 읽히고 있다. 1997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펴낸 『신성한 영감-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에 그의 신앙시 4편이 실렸을 정도로 그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시를 쓸 때 기어綺語의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며 겉과 속이 다른, 진실이 없는 말을 결코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구상 시인은 기인들과의 교류로도 유명했다. 화가 이중섭을 극진히 돌보았는가 하면 공초 오상순,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선구이자 ‘어린이 헌장’의 기초자인 마해송을 비롯해 걸레스님 중광에 이르기까지 그와 인간적으로 따뜻한 관계를 맺었던 기인들이 수없이 많다. 시인은 박삼중 스님이 벌이는 사형수 돕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중 한 명을 양아들로 삼고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는데, 결국 사형수는 7년 만에 무기로 감형된 데 이어 15년 만에 석방되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이중섭 화백의 작품을 판 1억원을 이웃을 위해 스스럼없이 내놓은 것을 비롯해 투병 중에도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에 그동안 아껴 두었던 2억원을 쾌척하는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늘 관심을 가져왔다. 이처럼 성자 같은 삶을 살았던 구상 시인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된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까지 겹치면서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힘들게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2004년 5월 11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