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06] 이길연의 "내 아픈 은유의 나라"
내 아픈 은유의 나라
이길연
벽에 걸린 초상화
어머니는 우물 속 블랙홀이다
언제나 이명 속에서 웅웅대는 블랙홀이다
내 안 바닷새들 뒤척이는 밤이면
뒤란 곁, 살구나무 아래 우물 속
어머니는 초승달로 떠오르고
이끼 낀 두레박을 내려 어머니를 만지면
어머니는 천조각의 거울로 깨어진다
내 아픈 은유의 나라
일렁이는 거울 속으로 사다리를 내리면
나의 창세기 그 시절의 블랙홀
그리움만 출렁거려 세상 모두 질식하고
어둔 방 불빛들 옹기종기 모여앉아
하루치의 기억을 지운다
지치도록 출렁대는 파도
바다의 자궁 속에 잠을 묻으면
내 안 바닷새들 파닥거려
바다 끝자락 물고 날아올라
하루를 깨운다
이 도시의 사막에서
세월 지나 나를 적시는 독한 그리움
어머니의 바다 한 장 들춰내며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본다
―<문학人신문>(2025. 12. 4)

[해설]
어머니는 물이다 우물이다 바다다
오늘 하루가 가면 양력 새해인 2026년이 된다. 2월 17일이 음력 1월 1일이므로 말띠 해니 병오년(丙午年)이니 하는 것은 그때 가서 사용할 수 있다. 어떻든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에 이길연 시인의 이 시를 읽는 이유가 있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다 돼 가는데 왜 이날만 되면 ‘우리 엄마’ 생각이 간절히 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를 여읜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그리움의 몸살을 앓을까?
시인은 어머니를 “우물 속 블랙홀”이라고 정의하였다. 그 블랙홀은 언제나 이명 속에서 웅웅댄다. 블랙홀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중성자별이 되지 못한 항성이 진화의 최종 단계에서 폭발 후 수축되어 생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강력한 밀도와 중력으로 전자기 복사, 빛을 포함한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상념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런데 어머니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어머니는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이고 나는 빨려 들어간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체온과 훈화로, 젖과 보살핌으로 자랐는데 어느 날 헤어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론 만난 일이 없다. 어머니는 내 아픈 은유의 나라에서 존재할 뿐이다. 그립지만 볼 수 없고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어느 때, 자궁에 그득한 양수(羊水) 속에서 헤엄치며 살지 않았던가. 그 안에서는 행복했었는데 세상에 나왔더니 세파(世波)가 너무 심했다. 헤치며, 헤엄치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던가.
이런저런 삶의 고단함을 겪으면서 살다 보니 내 나이 어느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랑 비슷해지고 있다. 어머니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살아온 시대보다 더 힘들었을 직유의 나라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을 겪고 군인 출신 대통령을 3명이나 겪고……. 시인이 정말로 벽에 어머니 초상화를 걸어놓았다면 효자다. 나는 효자가 아니어서 오늘 같은 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지을 뿐이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 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이길연 시인]
충남 청양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고려대, 선문대 강사, 선정관광고등학교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은평지부장, 《한국문예광장》 발행인. 시집 『아버님전 상서』 외 다수. 평론집 『한국문학의 자장과 지평』 외 다수.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