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개인전 ‘A Place We Have Never Been’… 기억과 상상이 빚어낸 ‘내면의 숲’
이지선 작가의 개인전 ‘A Place We Have Never Been’이 지난 9월 10일 서울 강남구 히든엠갤러리에서 개막해 오는 10월 2일까지 열린다. 히든엠갤러리가 주최·주관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유년기 기억과 상상에서 출발해 오랜 시간 내면에 형성돼 온 하나의 세계를 회화와 설치로 펼쳐 보인다.

전시의 중심에는 이지선이 지속적으로 구축해온 ‘내면의 숲’이 있다. 어린 시절 자연과 가까이 지내며 바라봤던 집 주변의 풍경, 익숙했던 방의 벽지 무늬, 동화책과 삽화, 종이인형 놀이, 친구와 함께했던 아지트의 기억 등이 시간이 흐르며 서로 스며들고 변형돼 작가만의 풍경으로 다시 태어난다.
당시에는 평범한 일상이었던 기억들이 현재의 시선과 만나면서 작품 속에서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실제 경험했던 장소와 책 속의 이미지, 작가가 어린 시절 스스로 만들어냈던 이야기와 감정이 뒤섞이면서 현실 어디에서도 정확히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작가에게 유년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사회의 기준과 타인의 시선, 스스로를 규정하고 검열하는 의식이 자리 잡기 이전, 현실과 상상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자유로운 시간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고 익숙한 공간에 새로운 세계를 더하며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감각이 작품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기억의 장소이자 마음속 낙원, ‘내면의 숲’
이지선의 화면에 등장하는 숲은 실제 자연을 충실히 옮겨놓은 풍경이 아니다.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기억과 상상 속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동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존재들이 서로 어울리며 놀이하거나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을 이어간다.
이러한 ‘내면의 숲’은 작가에게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동시에 유년기의 천진함이 머무는 마음속 낙원이다. 화면 속 인물들은 때로 그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으로, 때로는 숲과 작가의 내면을 지켜주는 존재처럼 등장한다.
이전 작업에서 작가가 숲을 향해 들어가며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그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여행자’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가는 숲을 여행하면서 오래된 기억과 다시 만나고 기쁨과 그리움, 성장과 상실의 감정을 현재의 시선으로 경험한다. 이때 작품 속 유년의 세계는 과거에 고정된 장소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통과하며 끊임없이 다시 구성되는 세계가 된다.
‘가본 적 없는 곳’을 왜 우리는 그리워하는가
전시 제목 ‘A Place We Have Never Been’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를 그리워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장소는 반드시 실제로 존재했던 공간만은 아니다. 실제 장소에 대한 기억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과 상상이 덧입혀지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의 풍경이나 스스로 만들어냈던 이야기도 때로 현실의 기억만큼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는다.
결국 실제 경험과 상상이 서로 뒤섞이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장소처럼 내면에 자리 잡는다. 이번 전시는 그처럼 기억과 상상이 서로 침투하며 만들어내는 심리적 풍경을 따라간다.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레몬’도 눈여겨볼 요소다.
작가는 레몬의 신맛이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감각에 주목한다. 입안에 퍼지는 강렬한 신맛이 예고 없이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게 하듯 특정한 감각은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현재로 단숨에 불러온다. 레몬은 작품 안에서 하나의 정해진 상징으로 규정되기보다 기억과 현재가 갑작스럽게 교차하는 감각적 장치로 자리한다.
30여 점 신작과 첫 설치작업… 캔버스 밖으로 나온 세계
이번 전시에서는 약 30점의 신작이 공개된다. 이전보다 깊어진 색감과 풍부해진 화면 속에서 숲과 풍경, 인물과 사물은 각각 독립된 장면을 이루면서도 서로 연결된다.
전시장을 따라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각각의 그림이 독립적인 기억의 한 장면에서 출발하면서도 점차 하나의 긴 서사를 이루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익숙한 자연은 기억을 통과하며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현실의 공간은 상상을 만나 낯선 장소로 변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나 순수한 환상 가운데 어느 한쪽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이지선이 처음으로 설치작업을 선보인다.
오랫동안 캔버스 안에서 구축해온 ‘내면의 숲’을 실제 공간으로 끌어냄으로써 회화 속 세계가 전시장으로 확장된다. 회화와 설치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관객이 바라보던 풍경은 하나의 입체적인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는 새로운 형식의 추가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세계가 화면이라는 경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변화다.

사진제공 히든엠갤러리.
전시된 ‘별 수집가의 꿈(A Dream of the Star Collector)’은 깊은 밤의 숲과 별빛 아래 펼쳐진 언덕,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작은 인물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겹쳐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162.2×130.3cm 크기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제작된 2026년 작품이다.

사진제공 히든엠갤러리.
또 다른 주요 작품 ‘한낮의 별수집가들(The Star Collectors in Daylight)’은 물가와 나무, 배를 연상시키는 구조물 위에 자리한 인물들을 통해 동화적 서사를 펼친다. 작품은 91×117cm 크기의 캔버스에 아크릴로 제작됐다. 두 작품 모두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이지선의 대표 신작으로 소개됐다.
이지선의 ‘내면의 숲’은 과거를 그대로 보관하는 기억의 창고라기보다 지금도 새로운 기억이 더해지고 과거가 현재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되는 살아 있는 세계에 가깝다.
가본 적 없는 장소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곳을 향한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이 뒤섞인 세계 속에서 한때 자유롭게 놀고 상상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찾으려는 마음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관객에게도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남아 있는 유년의 풍경과 오래된 감각을 천천히 들여다볼 시간을 건넨다.
전시개요
전시명: 이지선 개인전 ‘A Place We Have Never Been’
전시기간: 2026년 9월 10일 ~ 10월 2일
장소: 히든엠갤러리(Hidden M Gallery)
주소: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86길 16 제포빌딩 L층
주최·주관: 히든엠갤러리
관람시간: 화~토요일 오후 1시~6시
휴관: 일요일·월요일·공휴일
문의: 02-539-23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