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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규 칼럼] 명함 한 장에 담긴 삶의 무게감

조선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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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명함처럼 가벼워져야 한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송년회, 업계 포럼, 그리고 각종 총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준비합니다. 명함 지갑은 어느새 두툼해지고, 책상 서랍 한쪽에는 분류하지 못한 명함들이 쌓여갑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직함과 정보로 가득 찬 명함을 접할 때마다 묘한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한 장의 작은 종이 위에 빼곡히 적힌 직함들을 보면서, 이 사람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오히려 알 수 없게 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됩니다.

연말의 바쁜 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넓힌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상대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교훈을 줄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지 : 류우강 기자] 

명함은 겉보기엔 단순한 사각형의 종이에 불과하지만,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심리학자들은 명함을 자아의 외적 표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명함을 건네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연락처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한 장의 명함에 수많은 직함과 소속이 올려지는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앞면에는 ○○기업 대표이사라고 적혀 있고, 뒷면을 보면 △△협회 자문위원, □□포럼 운영위원, ◎◎교육원 교육 전문가, ××학회 감사, ◇◇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의 직함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름조차 생소한 단체의 직책들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도 흔합니다. 글자 크기는 읽기 어려울 정도로 작아지고, 여백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직함이 빼곡히 적혀 있으면, 명함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의 본업은 무엇일까,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이 많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명함이란 본질적으로 나를 명확하게 요약해서 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과도한 설명으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만을 안겨주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명함에 직함이 빼곡히 적혀 있으면, 명함을 받은 사람은 오히려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의 본업은 무엇일까,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일까, 이 많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같은 의문이 생긴다. 명함이란 본질적으로 나를 명확하게 요약해서 소개해야 하는데, 오히려 과도한 설명으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만을 안겨주는 역설이 발생한다.

과시는 왜 역효과를 내는가?

직함을 많이 적는 심리적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쌓은 이력과 다양한 경험들을 모두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직함이 많으면 능력도 많다라는 오랜 관념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직함과 지위가 개인의 사회적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해왔기에,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조직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전문성에 대한 인식은 역유자 곡선을 그립니다. 직함이 전혀 없으면 신뢰도가 낮지만,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신뢰도가 하락한다는 것입니다. 비즈니스 현장에서 평판은 스스로 얼마나 많은 직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타인이 실제로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의해 좌우됩니다.


직함이 넘쳐나면 여러 가지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전혀 관련없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은, 그 역할 중 어느 것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넓지만 얕은 지식, 많지만 피상적인 경험이라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사람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기업가인지, 교육자인지, 연구자인지, 자문가인지 알 수 없습니다.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명확한 포지셔닝이 중요한데, 이런 명함은 오히려 포지셔닝을 흐립니다.


과시욕이나 불안감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많은 직함을 나열하는 행위는 나를 인정해달라는 무언의 외침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는 내적 자신감의 부족을 보상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명함은 너무 많다는 인상을 주며, 역설적이게도 별것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단순함이 신뢰를 만듭니다.

반대로 진짜 실력자들의 명함은 놀라울 정도로 간결한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유명 디자이너, 성공한 기업가들의 명함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현재의 핵심 직함, 그리고 연락처만 담겨 있고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겨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름만 크게 적혀 있고 직함조차 생략하기도 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명함은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 애플이라는 단순한 정보만 담고 있었습니다.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명함에는 이름과 건축가라는 한 단어만 적혀 있습니다. 이런 명함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빈 공간이 그 사람의 무게와 내실을 드러냅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적을수록 더 많다 효과라고 설명합니다. 정보가 적기 때문에 상대방은 오히려 궁금증을 갖게 되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집니다. 명함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대화의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한 명함은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나는 내 이름과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불필요한 포장을 벗겨내고 본질만 남긴 결과입니다. 정제된 자신감이 명함 한 장에 고스란히 담기는 것입니다.


실제로 비즈니스 네트워킹 연구를 보면, 간결한 명함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은 후속 연락을 받는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명확한 정체성은 기억에 남기 쉽고, 필요할 때 떠올리기도 쉽습니다. 반면 복잡한 명함은 기억 속에서 흐릿해지고, 결국 연락하지 않게 됩니다.


삶도 명함처럼 가벼워져야 한다.

명함은 결국 우리의 삶을 응축한 작은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함에 드러난 과시욕이나 불안감, 혹은 집착은 그대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역할과 직함을 갖게 됩니다. 누군가의 부모이자, 자식이며, 직장에서는 특정 직책을 가진 사람이고, 동창회에서는 동문이며, 취미 모임에서는 회원입니다. 이 모든 정체성이 우리를 구성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동시에 드러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장 적절한 하나의 정체성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입니다. 비즈니스 미팅에서는 전문가로서의 모습을, 학부모 모임에서는 부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타인에게도 불편함을 줍니다.


세상은 복잡해 보일 수 있지만, 본질은 항상 단순합니다. 우리가 매달리는 수많은 직함과 역할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사라지고, 남는 것은 살아온 태도와 쌓아온 신뢰뿐입니다. 은퇴 후 명함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흔히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역설적이게도 직함에 과도하게 의존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명함을 고민하는 일은 결국 단순한 삶을 고민하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듬으며, 사고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단순함은 결핍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숙함의 표시입니다. 젊을 때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고,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성숙해질수록,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덜어낼 수 있게 됩니다. 명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직함을 나열하는 것보다, 하나의 정체성을 명확하고 당당하게 제시하는 것이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연말의 바쁜 일정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넓힙니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상대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교훈을 줄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해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 명함을 새로 만드신다면 덜어내는 용기를 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기보다는, 필요한 것만 담아내는 절제의 미학을 실천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명함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필요한 욕심을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하지만 깊은 내실이 깃든 하루하루가 되시기를, 그리고 여백의 미학이 담긴 삶을 사시기를 조용히 응원보냅니다.🫆


조선규 | 칼럼니스트  
조선규 칼럼니스트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조선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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