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그림 15] 시간의 켜를 쌓다, 오진국 화백의 ‘천년의 기다림’

196cm×188cm의 대형 캔버스 위, 사각의 리듬과 질감의 교차는 관람자의 시선을 천천히 휘감는다. 혼합 매체로 구현된 오진국 화백의 신작 ‘천년의 기다림’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층위와 시간의 깊이를 담아낸다.
규칙과 불규칙 사이, 시각적 철학
오 화백의 화면은 정제된 격자 구조 속에 서로 다른 재질과 색의 텍스처가 교차한다. 유화의 두터운 질감과 얇은 스크래치, 광택과 무광의 대비는 시각을 넘어 촉각적 상상을 유도하며, 규칙과 불규칙의 경계에서 긴장과 미묘한 균형을 만들어낸다.
작품은 디지로그(Digilog)의 미학, 즉 디지털 구조와 아날로그 감성의 결합을 통해 시간성과 감성을 중첩시킨다. 색의 농도 변화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흐름을 암시하며, 기다림이라는 정서를 화면에 퇴적시킨다.
‘겹’의 미학과 존재의 감응
‘천년의 기다림’은 오진국 화백의 대표 연작 ‘겹(Multi-Layer)’ 시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작가는 한지, 금속, 천 조각 등 한국적 재료를 통해 시간과 기억, 감정의 층위를 표현한다. 그의 작업은 객체지향적 존재론과 맞닿으며, 회화 속 요소들은 단순한 배치가 아니다.
관람자는 작품 앞에서 자신만의 기다림을 떠올리게 된다. 사랑, 이별, 꿈, 변화… 기다림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감성은 보편적이다.
“존재의 침묵을 시각화하다.” 이 한 문장이 ‘천년의 기다림’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낸다.
현대미술의 경향이 점점 더 개념과 기술 중심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오진국 화백의 작품은 철학과 감성의 균형을 지켜낸다. ‘천년의 기다림’은 시각적 구조와 감성적 울림을 결합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미술과 자신의 삶을 다시 연결 짓게 한다.
그 기다림은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며, 오 화백의 작업은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시간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