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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43] 박수현의 "자술연보"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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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술연보

 

박수현

 

  미역국 한 솥을 끓이네 미역국을 끓이면 언제나 윗목의 냉기가 뒷덜미를 감싸며 오르네 바닷속에서 해산한 어미고래들도 미역을 뜯어 먹는 풍속이 있다네 풀풀 김 서린 갯내에 나는 한 마리 새끼고래가 되어 검푸른 물결 속을 헤엄치네 내가 태어난 날 다섯 번째 딸을 낳은 엄마는 산국 대신 눈물 한 대접 마셨다지 똬리 튼 황룡이 대청마루에 앉는 태몽에 분명 고추 단 사내아이일 거라 믿었던 할머니는 탯줄만 끊고 산방을 나갔다네 윗목으로 밀쳐진 갓난쟁이 목을 미역 줄기 같은 탯줄이 휘감았다네 할머니는 자주 장죽 백동부리로 땅땅 아이의 머리통을 내려치곤 했다네 아이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네 그때마다 먼 바다를 헤엄쳐온 젖배 곯은 새끼 고래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네

 

  창밖에는 달빛이 미역국 대접에다 한 술 허기를 말고 있네 슬프면 젖무덤이 먼저 아파져 오는 것은 포유하는 에미들의 운명일까 찌르르 찌르르 달빛들이 아리게 가슴팍을 파고드네 산달이 오면 늘 배가 고프다는 엄마도 푸른 양수 속에 웅크리고 있는 새끼고래도 나를 위해 해피버스데이 투유를 불러주네! 나는 파도처럼 짙푸른 미역국 한 대접을 퍼담고 있네

 

―『처녑』(황금알, 2025) 

자술연보_박수현 [이미지: 류우강 기자]

  [해설]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나다

 

  다섯 번째는 아들이라고, 태몽까지 꾸었는데 낳고 보니 또 딸이다. 조선은 유교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가례(家禮)를 중시하다 보니 가부장제니 장자상속제니 남아선호사상 같은 것이 뿌리내렸을 테고, 그 뿌리가 근대화 과정에서도 뽑히지 않은 채 우리네 삶의 근본에 계속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선조는 出嫁外人이라고, 딸은 시집가면 남의 집 식구가 된다는 이상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집의 할머니는 며느리가 동성인 딸을 낳을 때마다 그렇게 싫어했다. 아니, 며느리도 손녀도 미워했다. 그런데 다섯 번째도 딸이라니.

 

  할머니는 며느리가 또 딸(시적 화자다)을 낳은 것을 보곤 탯줄만 끊고 산방(産房)을 나갔다. “윗목으로 밀쳐진 갓난쟁이 목을 미역 줄기 같은 탯줄이 휘감았다네도 그렇고, “자주 장죽 백동부리로 땅땅 아이의 머리통을 내려치곤했으니 못마땅함을 넘어 밉기만 했다.

 

  해산한 어미고래도 미역을 뜯어 먹는다고 하는데 산모는 그 무렵 미역국도 못 먹었나 보다. 시어머니가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한 것은 며느리가 미웠기 때문일 터인데, 실은 남자 쪽 요인이 더 크다고 한다. 생일날 축하받고 싶고 축복 속에 보내고 싶었지만 그것도 호사라고 누려보지 못하고 세월만 간다. 만약 이 시의 내용이 실화라면 어머니도 화자 자신도 억울하다. 아들을 못 낳았다고 온갖 구박을 다 당했을 터, 이곳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왕조 시대의 폐습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자는 생일축하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지만 그 꿈은 성인이 될 때까지 실현 불가능했다. 어머니의 경우를 보더라도 언감생심, 생일날 축복받는 희망을 가진 적이 없는 듯하다. 어떻든 우리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행복추구권이 있다. 이제는 부부유별, 일부종사, 남존여비, 여필종부 같은 사자성어조차 사라지면 좋겠다.

 

  [시인 박수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2003년 계간시지 《시안》으로 등단. 시집 『운문호 붕어찜』『복사뼈를 만지다』『샌드 페인팅』과 『티베트의 초승달』 등 3권의 연합기행시집이 있다.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지원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서울문화재단 원로예술인창작기금 수혜. 현 시인협회 중앙위원 및 한국디카시 서울양천지회 회장. 동천문학상 수상.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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