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향기] 도道를 형통하여 액을 뚫다

" 하늘이 내게 액을 주시거든 나는 내 도를 형통해서 그것을 뚫으면 하늘인들 또 내게 어찌하랴."
<채근담>의 말씀이다. 부엌도 없는 남의 집 뒷방, 직장도 치우고 불교학과 강의실에 앉아 생사生死의 이치며, 인간의 운명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었던 20대 중반, 나는 이 글귀와 만났다.
"하늘이 내게 박복으로써 대하면 나는 내 덕을 두텁게 하여 그것을 맞이할 것이며, 하늘이 내게 몸으로써 고달프게 하거든 나는 내 마음을 편안히 가져 그것을 보충할 것이며, 하늘이 내게 액을 주시거든 나는 도道를 형통하여 그것을 뚫으면 하늘인들 또 내게 어찌 하겠는가?" <채근담>의 그 마지막 구절에 붙들리고 말았다.
덕을 두텁게 하고 마음을 편안히 가져 그 박복과 고달픔은 보충한다고 하더라도 막힌 액은 어떻게 뚫나? 그것을 뚫고 싶었다. 나는 도를 알고 싶었다. 제방의 선지식들을 찾아뵙고 손이 닿는 대로 동서양의 경전과 고전을 들추기 시작했다.
도의 본체를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한다.
"도道 는 도라고 할 수 있으나 항상한 도는 아니고, 이름[명]은 이름 지을 수 있으나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
대자연의 본체를 굳이 표현하자면 '도'라 하나 표현된 '도'나 '이름'은 이미 본체가 아니요, 형상도 이름도 없는 본체를 굳이 또 표현하자면 '무無'라고 한다. 때문에 항상한 없음[無]으로 그 묘한 본체 세계를 보아야 하고, 항상한 있음[有]으로 현상세계를 보고자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같은 데서 나와 이름이 달라진 것 뿐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 같음[有*無]을 현묘하다고 하며 온갖 '묘용 妙用의 문'이라고 칭송하였다. 즉 무無의 본체와 유有의 현상을 같이 보아야 진정한 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의 유有와 무無, 불교의 공空과 색色, 그리고 주역의 음과 양의 이치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맹난자- <도道를 형통하여 액을 뚫다>
* 하늘이 내게 박복으로써 대하고, 하늘이 내게 몸으로써 고달프게 하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뚫고 나아갈 것인가? 작가의 그 깊은 물음을 나도 나에게 던져 본다.
내가 미력하나마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덕을 두텁게 쌓고, 마음을 편안히 가져 나에게 오는 박복과 몸의 고달픔을 보충해나가리라. 그러면 막힌 액은 어떻게 뚫을 것인가.
나약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 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길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