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해설] 배우식의 "동백꽃 여자"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 29 ]
동백꽃 여자
배우식
겨울 동백 발목부터 노을이 빼곡하다
높바람 속 나뭇잎이 가만히 입 내밀고
발갛게 빛나는 놀빛 잘게 부숴 삼킨다
문득 꽃눈 팽창되고 화들짝 꽃 피운다
인간의 얼굴 언뜻 비치는 붉은 동백꽃
내 발은 저 여자에게로 덩굴처럼 뻗어간다
―『가히』(2023년 봄호, 창간호)

[해설]
한 여성을 향한 사랑
동백꽃을 노래한 시와 시조가 워낙 많아서 인상적인 작품을 내놓기 어렵다. 내가 놀란 것은 첫번째 연의 중장과 종장이다. 나뭇잎이 놀빛을 잘게 부숴 삼킨다는 비유와 상징은 고차원적이라고 해야 할까 고도로 세련되었다고 할까. 게다가 이 시조는 동백꽃의 생명력을 예찬한 작품이 아니라 한 여성에 대한 사랑 고백이다. 제목부터 ‘동백꽃’이 아니라 ‘동백꽃 여자’이다.
동백꽃은 경칩쯤 되어야 피기 시작하는 다른 꽃과는 다르게 경칩이 되기 훨씬 전부터 핀다. 대략 11월 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2~3월에 만발하는 편이다. 제일 첫 문장은 “겨울 동백 발목부터 노을이 빼곡하다”인데 겨울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색 꽃을 피워낸 동백꽃을 묘사하고 있기에 첫째 수의 초장부터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한다. 높바람은 된바람과 비슷한 뜻으로, 매섭게 부는 바람이다. 높바람 속 나뭇잎이 가만히 입 내밀고 있으니 자생력 혹은 인내력이 대단하다. 나뭇잎이 입만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갛게 빛나는 놀빛 잘게 부숴 삼킨다”고 했으니 꽃의 특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대개의 꽃은 꽃잎이 하나하나 떨어지며 지는데 동백꽃은 질 때 꽃잎이 전부 붙은 채 한 송이씩 통째로 떨어진다.
눈이 내린 날 동백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요염함을 넘어 황홀경을 느끼게 된다. 청초함이 선정성을 느껴 몸을 부르르 떨게 된다. “문득 꽃눈 팽창되고 화들짝 꽃 피운다”를 보니 화자는 첫눈에 매료되는 어리석은 남자 같다. “인간의 얼굴 언뜻 비치는 붉은 동백꽃”이니 꽃이 붉은 립스틱을 칠한 유흥업소의 여성 같다. “내 발은 저 여자에게로 덩굴처럼 뻗어간다”가 결구인데 결국 이 어리석은 남자, 그녀에게 완전히 반하고 만다. 쯧쯧, 시조 속의 저 남자, 마누라한테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식의 해석이 견강부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에 대한 해석은 독자의 특권이다. 배우식 시인의 금슬은 대학원에서도 유명했다. 앞을 거의 못 보게 된 남편을 위해 시인연구 보고서를 직접 써 대학원 수업시간에 들어와서 남편의 이름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아아, 시인은 시 안에선 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동백꽃 같은 여성에 매료되고 말았다. 악성 뇌종양 제거 수술이 로봇수술로 진행되어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이승으로 돌아온 시인이기에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백꽃 여자에게 매료되어 상상의 날개를 펴보았다. 이런 연애는 나도 해보고 싶다.
[배우식 시인]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2003년 《시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 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그의 몸에 환하게 불을 켜고 싶다』, 시조집으로 『인삼반가사유상』, 『이렇게 환한 날에』 등이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나무 앞에서의 기도』 『사람 사막』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