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00] 문현미의 "늦은 묵념"
늦은 묵념
문현미
홀로 가신 가시밭 그 길은
가파른 좁은 길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거친 입김과 손가락질로
더욱 외롭고 쓸쓸한 길이었습니다
누구도 밟지 않았던 그 길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았던 그 길
모두를 품으시는 사랑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묵묵히 혹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온몸으로 드리셨던 기도의 힘으로
먼지 자욱한 세상을 견디는 오늘
솔뫼 향기 그윽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셨고
남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셨던
산보다 더 높으신 믿음 앞에서
바다보다 더 넓으신 믿음 앞에서
숱한 시간의 수레바퀴가 지나간 지금
눈먼 한 사람, 너무 늦게 무릎을 꿇습니다
눈부신 인내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거룩한 눈물이 녹아 있는 길을 따라
다만 두 손 공손히 모으고 걸어가게 하소서
가시에 찔리시며 흘리셨던 선혈의 핏방울
뭇 사람의 가슴에 푸르른 나무로 자라고 있습니다
—김남조 외, 『내 안에 너 있으리라』(시인생각, 2021)

[해설]
김대건 신부님의 최후를 아십니까?
오늘 크리스마스 아침,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시를 찾아서 올려야 하는데 찾아내지 못했다. 여러 편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내 뇌리에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 동방박사 세 사람의 축하를 받은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없고 누명을 쓰고 십자가 처형이라는 끔찍한 형을 당한 33세의 젊은이, 즉, 수난과 박해, 고통과 희생의 이미지로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못지않은 끔찍한 처형을 당한 김대건 신부의 이미지가 예수의 초상과 함께 떠오른다.
아명은 재복(再福)인데 지지리 복도 없어 25년 1개월 지상에 머물다 천국으로 갔다. 오늘은 예수의 죽음과 닮은 점이 있는 김대건 신부를 선양한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명상에 잠겨볼까 한다. 문현미 시인의 이 시에서 “솔뫼 향기 그윽한 하늘을 우러러봅니다”란 시행이 없었다면 예수의 생애를 다룬 시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으로, 충남 당진시 우강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한국 최초의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생가와 기념관이 함께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키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으니, 노예 반란자 스파르타쿠스가 바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예수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 복음을 전했을 따름인데 반란군의 수괴로 몰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김대건은 무지한 백성들을 서학(천주교)에 물들게 했고, 청나라에 수차례 밀입국하였고,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의 사제까지 되어 국내에서 암약했다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한다.
시인은 김대건 신부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다고 반성하고 후회한다. 뒤늦게 순교지에 찾아온 것에 대해 “눈먼 한 사람, 너무 늦게 무릎을 꿇습니다” 말하고는 묵념을 올린다. 한국 천주교의 역사는 이승훈이 영세받은 1784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김대건이 사제 서품을 받고 상하이 근교의 완담에서 첫 미사 집전을 한 1845년으로 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순교한 1846년 9월 16일도 잊지 말아야 할 날이다. 졸저 『최초의 신부 김대건』에서 순교 장면을 아주 길게 묘사했는데 일부만 제시한다.
이런 끔찍한 고문 과정에도 김대건 신부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았고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칼로 치기가 좋으냐?” “이제 나도 준비가 다 됐으니 어서 쳐라!” “빨리 목을 잘라라.” 당시의 군졸과 망나니들은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2명의 망나니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휘두르며, 목을 베는 시늉을 하며 신부를 에워싸고 돌기 시작했다. 몇 바퀴 돌더니 각자 한 칼씩 내려치기 시작했다. 목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덟 번 만에 머리가 완전히 끊어져 흰 모래 위에 나뒹굴었다. 피는 이미 거의 다 쏟아져 목에서는 피가 그다지 나지 않았다. 형리는 그 목을 주워들었다. 목판에 머리를 얹어 포도대장 앞으로 가 검사를 받았다.
오늘,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고 덕담을 나눠야 하는 날인데 이런 장면을 묘사해 영 송구하고 아쉽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 시집’인 『내 안에 너 있으리라』에 실려 있는 문현미 시인의 시를 읽으니 마음이 경건해지고, 내년 한 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큰 가르침을 받은 기분이 든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와서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김대건 신부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람을 구하였다. 殺身成仁 혹은 殺身聖人? 그러고 보니 2026년은 신부님의 순교 1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예수가 태어나신 날이 12월 25일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고 그냥 가설이지만 큰소리로 인사하자. 메리 크리스마스!
[문현미 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와 독일 아헨대학교(문학박사)를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아버지의 만물상 트럭』『그날이 멀지 않다』『깊고 푸른 섬』『바람의 뼈로 현을 켜다』『사랑이 돌아오는 시간』『몇 방울의 찬란』『별이 빛나는 서대문형무소』 등과 번역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문학선집』 4권, 안톤 슈낙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명시칼럼 『시를 사랑하는 동안 별은 빛나고』 등을 펴냈다. 박인환문학상, 풀꽃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윤동주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백석기독교문화예술관장 겸 백석대 부총장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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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아트뉴스의 대표 코너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편]이 오늘로 300번째 발표를 맞이했습니다.
2025년 3월 1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시를 해설해주신 이승하 시인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평일에는 시를, 토요일에는 시조를, 일요일에는 동시를 해설하며 독자들에게 다양한 문학의 향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지방 출장 중이거나 해외 여행 중에도 하루의 해설을 놓치지 않기 위해 10여 권의 시집을 직접 뒤척이며 작품을 골라 소개해주신 정성과 수고에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매일 아침 7시에 올라오는 시 해설은 독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며, 뜨거운 반응 속에 가장 인기 있는 코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또한 편집국이 함께 준비한 시 해설에 맞는 삽화 역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시와 그림이 어우러진 감동의 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코리아아트뉴스는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시와 예술의 아름다움을 나누며, 더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승하 시인님과 독자 여러분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