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함께 나눠 먹고 살아요 _너구리
[ 도시 농부 권연학의 좌충우돌 농사 짓기]
거름이 되라고 음식찌꺼기를 모아 밭에 묻었다. 마사토로 객토한 땅엔 유기물이 부족했다.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유기물 함량을 높이라는 토양 시험결과를 알려주었다.
추운 겨울에도 며칠 씩 모은 음식 찌꺼기를 꽁꽁 언 밭에 묻었다. 겨울 밭은 눈으로 덮혀 있다. 눈은 어느 곳에서든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삿포로의 눈이나 내 밭의 눈이나 아름답기는 매양 한가지다.
신출귀몰 동물들은 "함께 나눠 먹으며 살자' 고 한다.
산 쪽의 밭엔 짐승들 발자국이 눈 위에 콕콕 찍혀있다. 사람이 다니던 농로를 따라 야생의 발자취를 남겼다. 밭을 일군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이 신출귀몰한 녀석들을 마주친 적이 없다.
너구리 녀석은 지난 여름 옥수수를 모조리 따 먹었다. 키 큰 옥수수 대를 쓰러뜨리고 밤새도록 잘 익은 옥수수만 골라서 파 먹었다. 가증스러운 놈. 내 익히 너의 거무튀튀한 눈동자를 잊지 못하지.
옥수수 철이 지나고 여름이 한창 익어가면 너구리는 수박도 탐을 냈다. 그러나 껍질 두꺼운 수박은 먹지 못하고 대신 홀랑 뒤집어 놓았다. 너구리가 엎어 놓아 허연 뱃살을 하늘로 내민 수박은 여물지 않았다. 수박은 썩지 않았지만 자라지도 않았다. 여름철 잘익은 수박 한덩이가 얼마인데..내 한달 치 대포 값을 아깝게..
밤에만 다녀가는 녀석은 얼굴조차 모른다. 수줍은 색시처럼 내외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은 밤에 하는 것이기에… 그 못생긴 너구리 낯짝은 양재천에서 여러 번 보았었다.
얼굴도 본적 없는 놈은 그 행태와 똥으로 자신이 어떤 놈인지 밝힌다. 옥수수 먹는 놈은 너구리와 오소리. 음식 찌꺼기 파헤쳐 먹은 놈은 잡식성인 너구리. 어린 새잎 따먹는 놈은 고라니.
![AI 가 그린 도시 농부의 바램 [류우강 기자]](/_next/image?url=https://cdn.presscon.ai/prod/125/images/20250220/1739988768072_410968979.jpg&w=828&q=100)
너 선생 똥은 개똥 같이 생겼고, 고 선생 똥은 토끼똥처럼 생겼다. 못난 놈들.. .도둑질하고 흔적을 남기다니.
고라니의 밭 서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주로 밤에 내왕하지만 가끔은 낮에도 마주친다.
낮에는 밭 가운데 풀이나 곡식이 우거진 곳에 몸뚱이가 보이지 않게 자리를 만들고 앉아 쉬었다. 녀석은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 커다란 새 둥지 같이 풀을 둥글게 뭉개어서 자리를 만들었다.
고 선생은 나와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 산으로 도망간다. 놀란 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깜짝 놀라 소리를 치면 녀석은 엉덩이를 씰룩대며 잘 빠진 다리로 겅중겅중 산으로 도망간다.
고라니는 어린 새 순을 먹는다. 고춧잎, 고구마 잎, 나무 새순 같이 부드러운 어린 잎을 좋아 한다. 조금 자라서 뻣뻣해지거나 깻잎 처럼 거친 잎은 먹지 않았다. 고라니가 농사를 도울 때도 있었다. 재작년에 처음 심은 고추는 녀석이 순을 따먹는 바람에 적심(순치기)이 되어 수확량이 많았다.
고 선생은 겁도 많지만 비례하여 성질도 더럽다. 산속에서 울 때는 생긴 모습과 전혀 다른 캑캑거리는 괴상한 울음 소리를 낸다. 처음 밭을 조성할 때, 미리 디자인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이랑을 만들려고 나이론 줄을 길게 매어 놓았다. 이 줄들이 고라니 선생 다니는데 걸리적거렸는지 끈을 군데 군데 잘라 놓았다. 이빨은 역시 초식동물 이빨이다.
라일락 나무를 심고 뿌리가 바람에 흔들리지 말라고 가지 사이에 줄을 얼기설기 매어 놓았다. 어느날 밤, 마실 나왔던 고라니가 얼기설기한 줄에 엉켰다. 빠져나가려고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나일론 끈이 너덜너덜 헤져서 끊어지고 결국 나무는 말라 죽었다.
이 말썽꾸러기들은 사람들에게 함께 나눠 먹고 살자고 하고 사람들도 이들에게 제발 함께 나눠 먹고 살라고 한다.
나무는 여름에 2차 생장을 한다. 봄에 나온 가지가 여름을 지나며 다시 쑥 자랄 때를 2차 생장이라고 하는데, 이 가지 또한 부드럽고 여리다. "부드럽고 여리다"는 고 선생이 좋아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사과 과원을 만들려고 공부 삼아 사과나무를 저으기 심어 놓았다. 고라니는 봄에 묘목을 심어 아직 뿌리 활착도 안된 나무의 어린 순을 모조리 똑똑 끊어 놓았다. 이쯤이면 왠수다. 어디 고씨 인지 모르지만 수시로 밭 주인의 인내심에 도전한다.
한 때는 녀석들과 나눠 먹고 공생하려고 했다. 더우기 고라니는 멸종동물로 다른 나라에서는 보호종이란다. 드라큐라 같은 이빨만 빼고는 사슴 닮은 모습이 제법 사랑스럽기도 하다.
너구리는 음흉하고 거무튀튀한 눈매만 빼고는 그럭저럭 예뻐해 줄 만도 하다. 먹이를 잘 주면 개처럼 사람을 따르기도 한다니.
아! 어쩌냐. 곧 눈 녹는 춘삼월이 오면 이놈들과 새로운 갈등 국면에 맞닥드릴텐데...
그래도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은 나의 심사를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편집자 주] 30여 년 간 기업체에서 재무 전문가로 일해 온 권연학 씨는 고향 연천을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는 도시농부다. 좌충우돌 농사짓는 삼삼한 이야기로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