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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10] 박덕규의 "사랑의 힘"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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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박덕규

 

구름 구릉에 몸 숨기고 지내다

돌밭에 떨어지는 먼지 한 점이 되는 동안에도

공중으로 흩어져 가는 새 울음소리들을 모아 노래했나니!

 

저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

더 오래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 여기 온다고 믿었나니!

 

더 오래 전 잊힌 신화처럼

더 깊이 든 잠 속에서 자아올린 꿈 이야기처럼

그 사람 다시 올 거라고 믿었나니!

 

제 몸이 녹아 버릴 줄 알면서도

사랑의 불을 댕겨 버린 눈사람 요정처럼

내 이름을 지운 종이마저 태우며 숨죽여 살았나니!

 

구름 지고 바람 자다 일어나고

돌멩이들 수백 번 뒹굴어 성난 파도를 밀어내고 있을 때

텅 빈 하늘에 희미하게 몸 드러낸 그 사람 있었나니!

 

―『계간문예』(2025년 가을호)
 

  [해설]

 

   The Power of Love

 

  예전에 들은 옛날이야기다. 상처한 지 오래된 호호백발 노인에게 젊은이가 여쭤보았다. 요즘도 여자 생각이 나는지요? 한겨울이었다. 노인은 화로 앞에서 불을 쬐며 앉아 있었다. 불집게를 화로 안으로 쑥 넣어 움직여 화롯불을 밝고 뜨겁게 일으키더니 젊은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 내 몸은 이렇지만 마음은 이 화롯불이나 마찬가지라는 무언의 답. 젊은이는 고개를 몇 번 크게 끄덕이고는 물러나왔다고 한다. 사랑의 힘은 사춘기 소년이나 청년이나 장년이나 노년이나 내일모레 죽을 사람이나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일화이다.

 

  박덕규 시인이 이렇게 밝고 뜨거운 화롯불 같은 시를 쓸 줄이야! 읽고 반성을 많이 했다. 어느덧 퀴퀴한, 혹은 케케묵은 시를 쓰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한 대 딱! 때리는 것이 아닌가. “저 멀리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오래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여기 온다고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 ‘믿음’이 화자를 살아 있게 하였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더 오래 전 잊힌 신화처럼”, “더 깊이 든 잠 속에서 자아올린 꿈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사람 다시 올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치겠다. “내 이름을 지운 종이마저 태우며 숨죽여 살았나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오래 외로웠고, 얼마나 많이 그리웠으랴.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으리라. 이별의 슬픔이 가슴을 찢어, 바람이 불면 휘이잉, 가슴을 뚫고 지나갔으리라. 그런데 “돌멩이들 수백 번 뒹굴어 성난 파도를 밀어내고 있을 때”, “텅 빈 하늘에 희미하게 몸 드러낸 그 사람 있었나니!” 하고 외친다. 하하, 됐다. 이제 그 사람이 날 찾아왔고 만났으니 사랑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이런 시 죽기 전에 한 편은 쓰고 죽어야 하는데, 나는 아아, 안 될 것 같다.  

사랑의 힘_ 박덕규 [ 이미지: 류우강 기자]

  [박덕규 시인]

 

  1958년생. 안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시운동》 창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가로 등단하였다. 1994년 계간 《상상》으로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시집 『아름다운 사냥』『골목을 나는 나비』『날 두고 가라』, 소설집 『날아라 거북이』『포구에서 온 편지』『흰 산 기슭』, 탈북소설선 『함께 있어도 외로움에 떠는 당신들』, 장편소설 『밥과 사랑』『사명대사 일본 탐정기』, 평론집 『문학과 탐색의 정신』『문학공간과 글로컬리즘』, 기타 『강소천 평전』 등을 발간하였다. 단국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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