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해설] 신달자의 "선지해장국"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63]
선지해장국
신달자
한 사내가 근질근질한 등을 숙이고 걸어갑니다
새벽까지 마신 소주가 아직 온몸에 절망을 풍기는
저 사내
욕을 퍼마시고 세상의 원망을 퍼마시고
마누라와 자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마시다가
누구를 향해 화를 내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 잔
드디어 자신의 꿈도 씹지도 못한 채 꿀꺽 넘겨버린
저 사내
으슥으슥 얼음이 박힌 바람이 몰아치는 청진동 길을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걸어가다가
바람처럼 ‘선지해장국’ 집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야릇한 미소를 문지르며 진한 희망 냄새 나는
뜨거운 해장국 한 그릇을 받아드는데
소의 피, 선지 한 숟가락을 물컹하게 입 안으로
우거지 한 숟가락을 들판같이 벌린 입 안으로
속풀이 해장국을 한 번에 후루룩 꿀꺽 마셔버리는데
그 사내 얼굴빛 한번 시원하게 불그레합니다
구겨진 가난도 깡소주의 뒤틀림도 다 사라지고
속 터지는 외로움도 잠시 풀리는데
아이구 그 선짓국 한 그릇 참 극락 밥이네
어디서 술로 밤을 지샌 것일까 구석진 자리
울음 꽉 깨무는 한 여자도
마지막 국물을 목을 뒤로 젖힌 채 마시다가
마른 눈물을 다시 한번 문지르는데
쓰린 가슴에 곪은 사연들이 술술 사라지는데
여자는 빈 해장국 오지그릇을
부처인 듯 두 손 모으고 해장국 수행 끝을
희디흰 미소로 마무리를 하는데……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한국시인협회, 2013)에서

[해설]
마술을 부리는 선지해장국
청진동 해장국집들이 요즘도 잘되는지 모르겠다. 시적 화자가 어느 날 선지해장국 집에 가보았더니 주인도 가격도 음식 맛도 예전 그대로이다. (물론 이건 나의 상상이다.) 음식의 효용과 기능이 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마술을 부리는 것을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시의 화자는 관찰자이다. 선지해장국을 먹으러 해장국집에 갔더니 한 사내가 들어와 선지해장국을 시키는데 울화 앙앙하는 모습이고 몰골도 좀 초췌했었나 보다. 그런데 선지해장국을 시켜 먹으면서 사람 꼴을 갖춘다. 표정이 밝아지고 어깨도 펴고. 다른 자리의 한 여성은 밤늦도록 홧술을 마셨는지 용모가 영 말이 아니고 눈물까지 찔끔거린다. 그런데 국물까지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들이켜고 난 이후에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음식이란 게 이런 것이다. 추위가 사람의 마음과 몸을 얼어붙게 하지만 뜨거운 선지해장국 한 그릇이면 그 추위를 가시게 한다. 무슨 일로 상심이 커 마음이 잔뜩 위축되어 있을 때 밥 한 공기와 선지해장국이 뱃속으로 들어가면 해결의 실마리가 마음 한구석에서 떠오른다. 신달자 시인의 이 시는 음식이라는 것이 맛도 중요하고 허기를 면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번민을 해결하는 마술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을 예의 주목하여 이 시를 완성하였다. 비가 후줄근히 오거나 한겨울 기온이 영하 십몇 도로 떨어지면 선지해장국 집에 가보자.
[신달자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내고 숙명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평택대학교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4년 《여상》 여류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으로 재등단,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석정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편운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였고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시집 『봉헌문자』『아버지의 빛』『어머니 그 삐뚤삐뚤한 글씨』『오래 말하는 사이』, 서선집 『저 거리의 암자』,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수필집 『백치애인』『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고백』『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