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33] 김일연의 "눈 오는 저녁의 시"
눈 오는 저녁의 시
김일연
어둠에 눈이 깊던 맑은 날들을 길어
내 언제 저렇도록 맹목을 위하여만
저무는 너의 유리창에 부서질 수 있을까
무섭지도 않으냐 어리고 가벼운 것아
내 정녕 어둠 속에 깨끗한 한 줄 시로만
즐겁게 뛰어내리며 무너질 수 있을까

눈 오는 저녁, 맑은 시혼을 노래하다
하얀 눈발이 어둠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저녁, 시인은 그 속에서 잃어버린 맑음을 길어 올린다. 김일연의 〈눈 오는 저녁의 시〉는 눈이라는 단정한 자연의 형상 안에, 인간 내면의 순수와 그 순수의 파멸을 함께 담아낸 서정시다.
“어둠에 눈이 깊던 맑은 날들을 길어 / 내 언제 저렇도록 맹목을 위하여만 / 저무는 너의 유리창에 부서질 수 있을까.”
유리창 너머, 닿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시인의 갈망을 드러낸다. ‘눈’은 맑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의 비유로, 그 투명한 무게감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비추어본다.
이어지는 “무섭지도 않으냐 어리고 가벼운 것아”라는 물음은 눈에게, 혹은 시인 자신에게 던지는 독백이다. 세상 속에서 순수로 살아남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면서도, 시인은 여전히 그 맑음을 지키려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행의 “즐겁게 뛰어내리며 무너질 수 있을까”는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무너짐을 통한 자유의 고백이다.
김일연의 이 시는 자연의 정경을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투명한 흔들림을 포착한다. 눈 내리는 저녁의 고요함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삶의 본질적 순수로 돌아가려는 시적 영혼의 공간이다.
서정과 사유가 맞닿은 이 시는, 결국 “깨끗한 한 줄 시로 남고자 하는” 시인의 신념을 담은 선언이다. 눈발 속으로 천천히 스러지며 빛나는 그 한 줄의 맑음, 그것은 김일연 시의 가장 아름다운 내면이 길어 올린 노래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