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화엄사에 피어난 ‘예술의 인드라망’… 몸짓과 낭송, 현대미술로 만나는 화엄의 세계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화엄사에 색다른 예술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오래된 돌계단과 고색창연한 전각, 수행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에 춤과 시, 국악, 드로잉, 설치와 현대미술이 스며들면서 전통 사찰이 동시대 예술과 만나는 새로운 문화예술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본사 지리산대화엄사는 2026년 8월 1일부터 31일까지 화엄사 보제루와 성보박물관을 중심으로 ‘2026 화엄사성보박물관 초대전-화엄, 몸짓과 낭송’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사찰 공간에 현대예술 작품을 옮겨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존재가 관계 속에서 서로를 비추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화엄사상의 핵심인 법계연기(法界緣起)와 인드라망(因陀羅網)의 세계를 몸짓과 소리, 이미지와 공간으로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화엄사의 천년 수행정신과 현대예술의 실험성이 서로 마주하고, 춤과 낭송, 국악과 미술이 서로를 비추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인드라망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몸으로 묻고, 목소리로 답하다
‘화엄-몸짓과 낭송’의 중심에는 아방가르드 무용가 신은주와 시낭송가이자 한지 퍼포먼서인 엄경숙 국제하나예술협회 대표가 있다.

신은주는 오래전부터 인간 존재를 향한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누구인가”를 춤과 드로잉, 미디어아트 등의 예술언어를 통해 탐구해왔다. 이번 화엄사 전시에서도 작가는 자신의 신체를 단순한 춤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붓으로 확장한다. 파리에서 작업한 사진 위에 드로잉을 더하고, 몸의 움직임을 회화적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허문다.

신은주는 거대한 달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을 배경으로 두 팔을 크게 펼친 채 춤을 추고 있다. 그 앞에는 여러 색채와 문자가 입혀진 인체 조형물이 놓여 있고, 좌우에서는 장구와 현악기 연주가 어우러진다. 몸, 악기, 조형물, 자연과 사찰이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이 한 공간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바로 화엄이 이야기하는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존재하는 세계’를 현대적으로 시각화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신은주가 직접 인체 조형물에 색을 입히고 문자를 적어 넣는다. 인간의 몸을 닮은 조형체는 작가의 손길을 거치며 하나의 캔버스로 변화한다. 그 행위는 인간의 몸과 정신, 기억과 흔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완성되어 간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신은주는 화엄사상의 법계연기에 대해 모든 존재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결돼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하며, 몸짓과 목소리, 이미지와 공간이 서로 관계를 맺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전시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눈으로 보는 전시에서 ‘귀로 듣는 전시’로
엄경숙 작가의 작업은 ‘보는 전시’에 또 하나의 감각을 더한다.
화엄사 성보박물관에서는 관람객이 작품과 함께 설치된 QR코드를 통해 시낭송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는 이른바 ‘듣는 전시’가 펼쳐진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는 일반적으로 시각적 경험이 중심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목소리와 호흡, 시의 리듬이 작품 감상의 일부가 된다.
작품 앞에 멈춰 선 관람객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동시에 한 편의 시를 듣는다. 그 순간 작품은 단순히 눈앞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 언어가 연결된 또 다른 정신적 공간으로 확장된다.
엄경숙이 오랫동안 이어온 한지 퍼포먼스 역시 이러한 ‘연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지는 한국인의 삶과 기록, 문화적 기억을 품은 재료다. 작가는 한지를 찢고 펼치고 감싸며 시적 언어와 신체적 움직임을 결합한다. 전통 재료인 한지와 현대적 퍼포먼스가 만나는 과정 자체가 이번 전시가 지향하는 ‘전통과 현대의 화엄적 만남’을 상징한다.
광복절,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화엄사에 울려 퍼지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행사는 지난 8월 15일 제81주년 광복절을 맞아 화엄사 보제루에서 열린 특별공연이다. 공연의 중심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자리했다.
‘님의 침묵’은 이별과 상실을 노래하지만, 그 침묵 너머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강한 희망과 의지가 흐르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민족적 저항과 자유에 대한 염원의 상징으로도 읽혀 왔다. 천년고찰 화엄사에서 광복절을 맞아 이 작품을 몸짓과 낭송으로 다시 불러낸 것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공연은 엄경숙의 시낭송과 한지 퍼포먼스, 신은주의 아방가르드 춤을 중심으로 대금·가야금·양금·징·북·구음 등 전통음악 연주가 어우러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엄경숙은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낭송으로 공연의 문을 열고 한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어 신은주는 불교 수행의 이미지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담은 작품 ‘지옥게임’과 ‘아방가르드 님의 침묵’을 국악 연주와 함께 펼쳐 보였다.
춤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 완결되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었다. 시와 만나고, 음악과 부딪히고, 사찰의 공간과 호흡하면서 관객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냈다. 특히 공연의 마지막에는 두 작가가 ‘상주아리랑’에 맞춰 태극기를 모티브로 한 광복절 기념 퍼포먼스를 펼쳤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과 태극기, 현대무용과 한지 퍼포먼스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광복의 의미를 오늘의 예술언어로 되새기는 순간이었다.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오늘의 몸과 목소리로 광복의 기억을 다시 불러냈다는 점에서 이번 무대는 역사와 예술이 만나는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천년 사찰에서 펼쳐지는 현대예술의 새로운 실험
화엄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을 대표하는 사찰 가운데 하나다.
수많은 문화재와 불교미술, 오랜 수행의 역사를 품은 화엄사는 그동안 ‘보존해야 할 전통문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이번 ‘화엄-몸짓과 낭송’은 화엄사가 과거의 문화를 보존하는 공간을 넘어 현재의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संवाद하는 살아 있는 문화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래된 전각 앞에서 아방가르드 춤이 펼쳐지고, 성보박물관에서 QR코드를 통해 시를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며, 국악과 현대 퍼포먼스가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 전통과 현대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비추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화엄사상의 핵심과도 맞닿는다.
인드라망은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다고 전해지는 무한한 그물이다. 그물의 모든 매듭에는 보석이 달려 있고, 각각의 보석에는 다른 모든 보석이 비친다. 하나의 존재 속에 전체가 비치고, 전체 속에서 다시 하나가 드러나는 세계다.
이번 전시에서 춤은 낭송을 비추고, 낭송은 미술을 비추며, 국악은 몸짓을 비추고, 천년 사찰의 공간은 현대예술을 비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예술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파리에서 구례까지… ‘경계의 화엄’으로 이어지는 예술의 여정
‘화엄-몸짓과 낭송’에 이어 화엄사의 현대예술 프로젝트는 또 다른 장으로 확장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창작활동을 이어온 한국 작가들이 참여하는 ‘경계의 화엄-파리에서 구례까지’다. 부제는 ‘경계 너머의 유목민적 사유’, 전시 콘셉트는 ‘아틀리에, 구도의 길: 유목민의 사유 지도’다.
참여 작가는 홍현주, 문창돈, 최현주, 훈 모로, 박우정, 홍일화, 박인혁, 오세견 등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해 온 한국 작가 8인이다. 이들은 파리의 대표적인 한인 예술인 단체인 소나무작가협회와 인연을 맺고 활동해온 작가들로, 회화와 조각, 설치,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각자의 예술세계를 선보인다.
작가들이 탐구하는 주제 역시 다양하다.
색채와 질서, 우주와 DNA, 기억과 공간, 빛과 시간, 인간 존재와 인공지능(AI), 자연과 생태, 신체와 움직임 등 오늘날 인간과 세계가 마주한 여러 질문이 작품 속에 담긴다.
파리에서 출발한 예술적 사유가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서양 현대미술의 중심 가운데 하나인 파리와 한국 불교문화의 깊은 뿌리를 간직한 구례 화엄사.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이 예술을 매개로 연결된다.
그것은 마치 국경과 언어, 전통과 현대라는 수많은 경계를 넘어 또 하나의 인드라망을 만들어가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보존의 사찰’에서 ‘창조의 사찰’로
화엄사가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가장 큰 변화는 사찰과 현대예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수행전통을 지키는 것은 사찰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나 문화유산이 과거의 시간 속에만 머문다면 현재와의 연결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화엄사는 오히려 천년의 전통을 바탕으로 오늘의 예술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택했다.
불교의 철학이 현대무용과 만나고, 만해 한용운의 시가 퍼포먼스와 만나며, 성보박물관이 실험적 현대미술을 품는다. 이는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지닌 정신적 가치를 동시대의 언어로 다시 해석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화엄사 전시 관계자는 몸짓과 낭송,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파리 작가들의 현대미술이 모두 화엄의 ‘연결’이라는 정신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수행과 예술이 화엄사에서 서로를 비추며 새로운 문화예술의 인드라망을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비춘다
화엄사 보제루 앞에서 한 무용가가 두 팔을 펼친다.
그 앞에는 색채로 뒤덮인 인간 형상이 서 있고, 한쪽에서는 장구가 울리며 다른 한쪽에서는 현악기의 음이 흐른다. 산사의 돌계단과 소나무, 오래된 전각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천년 전 이곳을 찾았던 수행자들이 화엄의 세계를 마음속에서 그렸다면, 오늘의 예술가들은 그것을 몸과 목소리, 색과 소리로 보여준다.

시대를 뛰어넘어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가.
‘화엄-몸짓과 낭송’은 그 질문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춤과 낭송, 국악과 현대미술이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그 관계 속에서 관람객 각자가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한다. 천년고찰 화엄사에서 펼쳐지는 이번 예술의 실험은 결국 화엄사상이 말해온 오래된 진리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들려준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비추며, 함께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그 오래된 깨달음이 2026년 여름, 지리산 화엄사에서 다시 춤추고 있다.
전시 개요
전시명 : 2026 화엄사성보박물관 초대전 ‘화엄-몸짓과 낭송’
기간 : 2026년 8월 1일~8월 31일
장소 : 지리산대화엄사 보제루·화엄사성보박물관
참여 : 아방가르드 무용가 신은주, 시낭송가·한지 퍼포먼서 엄경숙
기획 : 화엄사성보박물관 부관장 강선정
큐레이터 : 서정아, 허윤
진행 : 에듀케이터 곽학천
주최·주관 : 화엄사·화엄사성보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