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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87] 박세현의 "편지" 외 1편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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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박세현

 

선생님께

 

잘 계시지요?

아시다시피 여기는 여전히

정치상황이 개판입니다

민주주의가 되거든 한 번 오세요

시간은 좀 걸릴 겁니다

아직 빵에 가야 할 사람 많거든요

그동안은 참고 거기 사세요

좋은 날 연락드리겠습니다

 

20256월 서울에서

박아므개

올림

 


딴생각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딴생각을 한다

 

시를 쓰는 날도 있다

무슨 영감이 와서 쓰는 건 아니고

단지 심심해서 단지 한심해서 쓴다

아무것도 아닌 no인이 책상 앞에서

중얼중얼 낙서를 한다

이런 것도 시라면 괜찮을 거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성가신 존재론적 통증

일어나 거울을 본다

시에서 빠져나와 나와 마주친 저 얼굴

한때는 나였을 것이나 너무나 낯설어진

남 같은 당신은 누구詩던가

 

—『그분, 아직 살아 있나요?(경진출판, 2025)

편지 _ 박세현 시인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냉소주의자의 시선으로 이 세상을

 

  오늘은 1212군사반란 46주년이 되는 날이다. 박세현 시인이 쓴 「편지」라는 시를 읽고 속이 후련하다고 예찬하는 사람과 이 사람 뭐가 이리 불만이야?’ 하고 성토하는 사람으로 나눠질 것이다. 요즈음 역이민이 부쩍 늘고 있는데 이 시의 화자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개판이니 안정될 때까지 보따리 싸지 말고 그 나라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아직 빵에 가야 할 사람 많거든요은 감방을 가리키니 비상계엄 선포에 연루된 사람들 얘기가 아닌가 한다.

 

  이런 시를 가리켜 풍자시라고 한다. 조선조 후기에 풍자성이 농후한 사설시조와 엇시조가 많이 창작되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위정자와 관리들을 풍자하기 위해 사람들이 익명으로 시조를 썼던 것이다. 에라, 꼴 보기 싫은 놈들을 향해 욕이라도 해주자 하는 심보로 시를 썼는데 편수가 엄청났다.

 

  그때에 비하면 오늘날 풍자시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지하ㆍ송욱ㆍ전영경ㆍ신동문에 이어 이성복ㆍ황지우ㆍ박남철, 그리고 김영승ㆍ장정일ㆍ함민복ㆍ유하 등이 즐겨 쓴 현실풍자시는 시대를 날카롭게 해부한 메스와도 같았다. 그들은 시니컬한 냉소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이 시대에 박세현 같은 no인이 있으니 반갑다. 스스로 이런 것을 시라고 하지 않고 낙서이며 성가신 존재론적 통증이라고 한다.

 

  지금 이 시대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존재일까? 아직도 음풍농월을? 아직도 자연예찬을? 아직도 사랑타령을? 시인은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을 보며 한때는 나였을 것이나 너무나 낯설어진/ 남 같은 당신은 누구詩던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시라는 이 시시한 것을 쓰고 있는 나 박세현을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문하고 있다.

 

  [박세현 시인]

 

  1953년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교육대학을 졸업했다. 1983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고, 25년간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며 교수생활을 했다. 시집 『아무것도 아닌 남자』 『저기 한 사람』『헌정』『본의 아니게』『사경을 헤매다』『치악산』『정선아리랑』『길찾기』『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나는 가끔 혼자 웃는다』 등을 냈다. 산문집 『시를 쓰는 일』『오는 비는 올지라도』『시만 모르는 것』『시인의 잡담』『설렘』『거북이목을 한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아침』 등을 냈으며,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세계』가 있다. 산문소설 『페루에 가실래요?』를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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