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 교수의 삼삼한 우리말] 안갚음과 앙갚음

안갚음과 앙갚음
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명예교수 최태호
대학 시절에 설촌(雪村) 김상홍(金相洪) 선생님께 <진정표(陳情表)>라는 글을 배웠다. 그 당시에도 참으로 눈물을 많이 흘리며 읽던 글인데, 오늘 다시 읽어 보니 여전히 눈물이 나올 정도의 명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시길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요, <진정표(陳情表)>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효자자 아니다”라고 하셨다. 흔히 반포지효(反哺之孝)로 잘 알려진 글이 바로 이밀의 진정표라는 글이다. 일부분만 인용해 보면
“유 씨(할머니)는 목숨이 서산에 걸린 해와 같아서 숨결이 가물가물하고, 인명이 위태로워 아침에 저녁 걱정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없었으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고, 할머니는 제가 없으면 남은 생을 마칠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와 손자가 서로의 목숨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구한 변명으로 능히 할머니를 두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금년에 나이가 마흔 네 살이고 할머니 유 씨는 아흔 여섯입니다. 제가 폐하께 충성을 다할 날은 아직 많이 남아 있고, 할머니께 보답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까마귀의 (반포보은하고자 하는) 정으로 바라옵고 바라옵나니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만 봉양하도록 애원하옵나이다.(劉日薄西山, 氣息奄奄, 人命危淺, 朝不慮夕. 臣無祖母, 無以至今日, 祖母無臣, 無以終餘年, 母孫二人, 更相爲命, 是以區區不能廢遠. 臣密今年四十有四, 祖母劉今九十有六, 是臣盡節於陛下之日, 長, 報劉之日, 短也. 烏鳥私情, 願乞終養)
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반포의 효를 일컬어 ‘안갚음’이라고 한다. 많은 독자들이 의아할 것이다. 앙갚음을 잘못 쓴 것이 아닌가 하고 다시 질문을 할 수도 잇다. 그러나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두 단어는 받침 하나의 차이로 정반대의 뜻을 지니고 있다. 발음도 비슷해서 착오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진나라의 무제가 동궁의 스승이 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거절하면서 올라가지 못한 이유가 바로 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함이었으니 이밀의 할머니에 대한 효도가 가히 본받을 만하다.
안갚음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일. 2.자식이 커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라고 나타나 있다. 예문으로는 “새들도 안갚음을 하는데, 사람임에랴!”, “이제는 안갚음할 나이가 되었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 인용)라고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식이 커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을 ‘안갚음하다’라고 표현한다.
‘앙갚음’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두루 알고 있는 바로 그 말이다. “남이 저에게 해를 준 대로 저도 그에게 해를 줌.”이다. 같은 말로 ‘보갚음(남이 해를 주었을 때,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일)’이라는 단어가 있다. 예문으로는 “ 그동안 내가 받아온 멸시와 모욕에 대한 앙갚음으로 단단히 혼쭐을 내 줘야지.”(<표준국어대사전>), “기표가 무서워서, 그의 안하무인한 앙갚음이 두려워서 제적을 못 시켰다는 그런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전상국, 우상의 눈물’에서 재인용)와 같은 것이 있다.
그러니까 앙갚음과 안갚음은 의미상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똑 같이 되돌려 주는 것은 같지만 하나는 보복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답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안갚음’에서 ‘안’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있다. 절대로 ‘아니’의 준말이 아니다. ‘마음을 다해 키워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이의 상대어는 ‘안받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 또한 “부모가 자식의 봉양을 받는다.”는 뜻인데,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기본형이 ‘안받다’이니 ‘안 받다’와 헷갈리기 딱 좋은 단어다. 안갚음, 앙갚음, 안받음 등의 세 단어는 생소하지만 구별하여 쓰면 좋은 순우리말이다.

한국어문학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