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16] 김강호 "섬진강의 봄"
섬진강의 봄
김강호
섬진강에 봄이 올 땐 왈츠 선율로 온다
악보를 빠져나와 나비가 된 음표들
평사리 들판 가르며
악양으로 가고 있다
초록빛 새소리를 한 두릅 꿰어 메고
꽃눈 흠뻑 맞으며 강둑길 거닐다가
여울이 뽑아 올리는
노래에 홀려 있다
경계를 다 지우고 바다로 가는 섬진강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가
물길 차고 오른다

섬진강은 남도 시인들이 잘 다루는 소재이다. 이 시조는 섬진강에 약동하는 봄을 눈에 보이듯 시각화한다. “경계를 다 지우고 바다로” 가는 강물에서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를 읽어내는 기미(機微)란 탐미기법에 고단수가 아니고선 축약해내긴 어려울 거다.
감각적 봄은 이처럼 도원경(桃源境), 아니 시원경(詩源境)이나 진배없다. 섬진강 봄을 맞는 화자의 나들이 기분은 “왈츠 선율”처럼 날아갈 듯 가볍다. 춤곡은 “악보를 빠져나와 나비가 된 음표들”로 재시각화 된다. 둘째 수에서 “초록빛 새소리를 한 두릅 꿰어 메고 꽃눈을 맞으며 강둑을 거니”는데, 보아하니 강은 이미 “여울”을 “뽑아 올리는 노래”에 마냥 취해 있다.
자식이 첫 월급을 타 사온 라디오를 오지게 들여다보며 듣고 또 듣던 옛 아버지의 벙그러진 얼굴처럼 시각과 청각의 효과를 동시상영 같은 표정에 얹었다. 셋째 수에서는 “경계를 다 지우고” 가는 물의 혼융을 싣는다. 그 동안 가졌던 획책을 풀고 비로소 자신을 찾아가는 투명함으로 새봄을 맞는다. 그러니 화자로선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하기를 “벌려” 온 건 당연한 일이겠다. 그게 극서정에 실리는 바, 한 메타시조 기법으로도 보인다. 강변에서 맞는 바람과 물길, 우리 앞에 한 폭 수채화나 시화(詩畵)로 펼쳐지는 이 축가를 아무 대가 없이 이 시조로 받는다.
시조의 구성이 [섬진강] (1)[왈츠의 선율](나비가된 음표들이 가르는 평사리 들판) (2)[여울의 노래](초록빛 새소리를 꿰어 멘 한 두릅) (3)[투명한 시](시심을 번뜩이며 벌려온 비상)으로 연결되어 이미지의 연쇄 고리가 짝지어 보인다. 하니, [ ] 안의 상징 장면 상과 ( ) 안의 구체 장면 상, 그러니까 장면의 복합구성이 여타의 ‘강’과 ‘봄’에 관한 표현과는 차별화될 수 있겠다.
흔히 알기로 ‘섬진강’하면 김용택을 꼽는다. 송수권은 남도 가락을 섬진강변 창작실 ‘어초장(魚礁莊)’에 꾸리고 강물의 시를 오래 써왔는데, 그걸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김강호의 「섬진강의 봄」은 시조로 노래하는 최초의 극서정이 될 듯도 싶은 데 건너짚다 틀려 야단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심을 번뜩이며 비상을 벌려 왔던 가슴팍 투명한 시”를 섬진강에서 건져 올린 건 분명 서정적 자유주의를 추구한 극적 시학일 게다.
<노창수 시인,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