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47] 이정환의 “애월 바다”
애월 바다
이정환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이 시 「애월 바다」는 바다라는 공간을 통해 사랑의 기억과 인간 내면의 울림을 서정적으로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시 속의 풍경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감정의 깊이를 비추는 상징적 장치로 작동한다. 노을이 지는 저녁의 바다는 하루의 끝이면서 동시에 마음속 이야기가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시간이 된다.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는 표현은 바다를 하나의 생명처럼 노래한다. 여기서 바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고백을 받아온 존재다. 노을은 하루 동안 감춰 두었던 감정이 마지막 빛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이다. 붉게 번지는 하늘은 사랑의 열기이면서 동시에 사라져 가는 시간의 쓸쓸함을 함께 품는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끝이 저린 저녁”이라는 구절에서는 지명 하나가 감정의 깊은 촉매가 된다. 어떤 장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호명이 아니라 기억을 불러오는 행위이다.
이어지는 노을의 이미지는 ‘말’의 상징으로 변한다. 노을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풀어놓고 있다는 구절은 자연이 인간의 마음을 대신 말해 주는 장면이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이라는 구절에서 공간은 더욱 확장된다. 벼랑은 삶의 끝자락 같은 아슬아슬한 자리이며, 먼 파도는 시간과 거리를 넘어오는 기억이다. 수평선은 닿을 수 없지만 계속 바라보게 되는 희망 혹은 그리움의 경계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다른 차원이다.
마지막 수 종장에서 등장하는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은 이 시의 정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온다. 그들은 파도를 바라보거나 물결을 만지며 마음을 달랜다. 물결을 매만진다는 표현은 치유의 행위이자 고백의 몸짓이다.
결국 이 시에서 애월의 바다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다. 노을과 달빛, 벼랑과 파도와 수평선은 모두 사랑의 다양한 얼굴이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고, 편지를 쓰고 싶게 만들며, 상처를 어루만지게 하는 공간. 그곳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애월의 바다는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깊이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