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세상보기] 빛바랜 종이 한 장 / 이호봉



빛바랜 종이 한 장
이호봉
서랍을 정리하다 보았다
낡은 종이 주머니 안에서 나온
빛바랜 종이 한 장,
1963년, 나의 결혼식 축사였다.
감회(感懷)에 젖어 다시 읽어보니
예식장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지금의 나를 거울 앞에 세웠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체형은 기울었고
노쇠한 귀는 청력을 다소 잃었지만
정성껏 쓴 축사의 글자들을 보니
희미한 기억의 한 편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63년 전,
그날의
그 모습들이.

시인은 올해 87세이다 아들, 딸 결혼시키고 지금은 혼자 살고 계신다. 이 나이쯤 되신 분들은 대부분 중요한 문서나 귀중한 물건 등을 장롱 깊숙이 보관하거나 감춰둔 게 예사였다.
시인은 며칠 전, 낡삭은 종이봉투 안에서 빛바랜 한 장의 종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1963년 7월 20일, 3페이지짜리 본인의 결혼식 축사였다. 내년이면 미수를 맞이하는 연세인데, 결혼식 또한, 환갑을 넘어섰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식을 차마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주마등처럼 스치는 순간, 순간의 풍경들이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축사를 읽고 난 뒤, 거실 한 편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다. 모습을 본 게 아니라, 어쩜 63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반추했을 것이다.
비록 몸과 마음은 세월의 무게만큼 짓눌리고 노쇠해졌지만,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쓴 축사를 보면서 회한에 잠겨보는 63년 전 그날. 지금은 할머니의 모습이 되어 63년 전 그날과 그날의 모습을 떠올리며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99세에 시집을 출간한 시바타 도요의 시구가 생각난다.
‘… 나도 괴로운 일/많았지만/살아 있어 좋았어//너도 약해지지 마.’
참고로, 이호봉 시인님은 필자가 강사로 있는 부천시 소사구청 ‘문예창작반’에서 여러 문우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계신다. 시뿐만 아니라 시낭송가로서, 사진작가로서 그 외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고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