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임의 시조읽기 46】 김희운의 "산담엔 막핀꽃"
산담엔 막핀꽃
김희운
손 내민 그 뜻을 배롱나무는 또 묻는다
욱신욱신 노루손이 오름 땡볕 등지고
우러난 바람 삼키며 눈 감고 귀 막고
한소끔 땀방울로 토막난 속내 쏟아낸다
숨소리 말라가도
울음소리 허기져도
기어이 붉은 꽃으로,
화산섬 진통제로
《정형시학》 (2025. 겨울호)

1100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라산 중산간에 위치한 오름이 노루손이오름이다. 길을 걷다 보면 삼나무 숲길과 흙길이 주는 포근함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산담엔 막핀꽃」은 서정적 서사시다. 주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기어이 붉은 꽃으로, / 화산섬 진통제”에서 보듯 4·3 서정적 서사시로 유추해볼 수 있다.
‘막핀꽃’은 정상적인 개화 시기가 아니라 비정상적인 시기에 피는 꽃을 말한다. 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편함을 가져온다.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시신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는데, 배롱꽃은 눈치도 없이 피어버린 존재가 된다.
“욱신욱신 노루손이 오름 땡볕 등지고 / 우러난 바람 삼키며 눈 감고 귀 막고” 제주 4·3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 발생한 무력충돌이다. 진압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군·경찰을 피해 산으로 도망쳐야 했고, 살기 위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해야 했던 시대였다. 침묵은 비겁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는 이들이나, 스스로 가두는 오름이나 모두 삶의 한 방식이다.
“한소끔 땀방울로 토막난 속내 쏟아낸다” 은폐의 역사 4·3에 희생된 자들은 명예를 찾기 위해 재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몸과 말의 증언으로 하고 있다. 몸으로 새겨진 기록은, 숨소리는 말라가고 울음소리는 허기지다 판결문에 남을 것이다.
“기어이 붉은 꽃으로, / 화산섬 진통제로” ‘기어이’라는 말은 의지가 아니라 운명적인 도달이다. 말하지 못해도 기억하지 못해도 끝내 도달하는 붉은 꽃은 피의 색을 닮았다. 그것은 기념비도 위령도 아닌 ‘화산섬 진통제로’ 고통을 치유하지 못하고 진통제처럼 잠시 무디게만 한다.
「산담엔 막핀꽃」은 살아남기 위한 침묵의 존재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땀과 몸으로 증언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다. 특히 자연을 중립의 존재가 아니라 사건을 흡수한 증언자로 설정한 것도 독특하다. 또한 붉은 꽃은 진통제는 될 수 있지만, 치료는 아니라는 화자의 시각 또한 이색적이다.
계절의 기준이 되는 것은 온도와 바람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후각으로 느끼는 계절이다. 배롱꽃 내음, 푸름의 냄새, 후텁지근함이 여름의 냄새로 기억된다면, 코끝을 아리는 차가움, 칼칼하고 뜨거운 국물 냄새, 붕어빵 냄새는 겨울의 냄새일 것이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제주의 4·3은 어떤 냄새로 어느 계절을 건너가고 있을까.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2025년 제1회 소해시조창작지원금 수상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편집자주: "강영임의 시조 읽기"는 매주 수요일 아침에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