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53] 황순원의 "젊은이여"
젊은이여
황순원
젊은이여,
쉴 사이 없이 붉은 피가 전신을 순환하는 젊은이여,
그까짓 고통은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다.
어째서 눈물을 흘리는가, 한숨을 짓는가.
분하고, 아깝지 않으냐, 그 열정의 눈물이, 그 결정의 한숨이.
젊은이여,
더욱이 그것은 마음 약한 사람의 짓이다.
슬퍼할 사람은 따로이 있다, 늙은이다.
젊은 우리는 굳센 의지를 갖고,
몸과 마음을 던져 이 세기와 싸워나갈 이 땅의 용사가 아니냐.
그러면, 젊은이여,
우리는 먼저 지금까지 부끄럼 없이 쓰고 온 거짓의 칼을 아낌없이 벗어,
타오르는 불길에 훨훨 태워버리고,
뒷날의 썩어질 거문고는 쉬스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지자.
그리고, 누구 앞에 서든지 줄어들지 않을 ‘참’된 군복, 투구, 신들메를 튼튼히 하고,
앞날의 행복을 기약할 수 있는, 정의의 장검을 억센 팔뚝에 들어보자.
젊은이여.
그래도 우리의 마음이 허락지 않고, 거짓만 따르거들랑
젊은이여, 우리는 참다운 젊은이답게 의를 위한 날카로운 그 칼끝으로
주저 말고 우리의 앞가슴을 쿡쿡 찔러 쉬인 피를 닦고, 살아 뛰는 피만을 남겨두자.
—《동광》 제29호(1932.1)

[해설]
소설가 황순원의 등단 지면은 도산 안창호가 1926년 5월 20일자로 창간한 종합지 《동광》이었다. 등단작은 「나의 꿈」이란 시인데 제23호(1931.7)에 발표되었다. 「젊은이여」라는 제법 긴 시는 1931년 10월에 쓴 것으로, 제29호(1932.1)에 발표되었다.
《동광》에 「나의 꿈」이 실린 것은 17세 때인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이었다. 황순원이 1915년 3월 26일생이므로 「젊은이여」라는 시는 생후 16년 반쯤 되었을 때 쓴 것이다. 황순원은 1929년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객지 생활에 건강이 안 좋아져 부모님이 계신 평양으로 돌아왔고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동광》에 「나의 꿈」에 이어 「아들아! 무서워 마라」를 보냈는데 실어주었고 세 번째 투고작인 「젊은이여」를 실어주었으니 신기했을 것이다. 황순원이 세상에 처음 내놓은 책도 시집이었고 두 번째 내놓은 책도 시집이었다. 그의 첫 소설작품은 1937년 7월 《창작》 제3집에 발표한 「거리의 부사」이므로 등단 후 6년 동안 그는 시인이었다.
기성세대를 일제에 순응한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로 인식한 황순원은 젊은이들에게 기대를 하겠다고 외치면서 여러 가지 당부를 하고 있다. 그는 유세 현장의 외침 같은 이 시로써 젊은이들의 가슴을 벅차게 하고, 행동의 대열에 나서기를 부추기고 있다. 시의 내용이 상당히 과격하다. 중학생이 이런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동적인 시를 발표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3ㆍ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의 부친은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는데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었다. 아버지의 애국심이 그의 가슴에 심어졌던 것이다.
평양의 숭실중학교 학생이 쓴 이 시를 《동광》에서 실어준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문예지는 총독부의 명령 한마디면 그날로 폐간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였는데 “참다운 젊은이답게 의를 위한 날카로운 그 칼끝으로/ 주저 말고 우리의 앞가슴을 쿡쿡 찔러 쉬인 피를 닦고, 살아 뛰는 피만을 남겨두자.”로 끝나는 시를 실어준 것은 실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었다. 황순원은 《동광》 제33호(1932.5)에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란 또 한 편의 현실참여시를 발표한다.
황순원은 젊은이들에게 더 이상 고뇌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우리의 젊음을 바치자고 부추긴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우리의 이 젊음을 불살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조국, 독립, 희생 같은 낱말을 쓰지 않았기에 일본 검열관은 이 시를 《동광》에서 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라면 우리 젊은이들은 목숨도 바쳐야 한다는 선동적인 내용의 시를 중학생 황순원이 쓸 생각을 했고 발표할 생각을 했고 실어준 문예지가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다.
[황순원 시인]
1931년과 32년에 걸쳐 《동광》 다섯 호에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고 황순원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에서 와세다 제2고등학교에 적을 둔 학생 신분으로 첫 시집 『방가』를 1934년 11월 25일자로 발행한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와세다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인 1936년 5월에 두 번째 시집 『골동품』을 펴낸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