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음악

[이 한 장의 음반] 67, 회고전 회화와 현대 팝의 만남, 니에베스 곤잘레스가 그린 릴리 알렌의 《West End Girl》

임만택 전문 기자
입력
스페인 바로크 초상화에 현대적 감각을 입힌 젊은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 영국 싱어송라이터 릴리 알렌의 2025년 다섯 번째 정규앨범, 음악과 미술이 빚어낸 특별한 예술적 교감

음악을 듣는 즐거움은 귀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장의 음반을 손에 들고 표지를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이미지와 음악의 관계를 발견하는 일 역시 음반 감상의 중요한 즐거움이다. 특히 화가가 직접 그린 초상화가 앨범 커버를 장식할 때, 음반은 단순한 음악의 기록물을 넘어 하나의 시각예술 작품으로 다가온다.

앨범 내지를 펼치면 제대로 된 전신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이번 67회에서 소개할 음반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릴리 알렌(Lily Allen)이 2025년 발표한 다섯 번째 정규앨범 《West End Girl》이다. 앨범의 표지를 장식한 작품은 스페인 출신의 젊은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Nieves González)가 그린 릴리 알렌의 초상화다.

 

고전적인 인물화의 구성과 현대적인 패션, 전통 회화의 깊이와 대중음악의 감각이 한 화면에서 만나는 이 작품은 오늘날 음악과 미술이 어떻게 서로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는지 보여준다.

 

바로크 회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니에베스 곤잘레스

 

1996년 스페인 우엘바(Huelva)에서 태어난 니에베스 곤잘레스는 현재 그라나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구상 회화 작가다.

스페인 출신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 작품

그녀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세트였다. 이 경험은 어린 곤잘레스에게 회화의 세계를 열어주었고, 노란색을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기억하게 만든 특별한 계기가 되었다.

 

17세에 세비야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한 그녀는 스페인 회화의 위대한 전통 속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특히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으로 대표되는 스페인 바로크 회화는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벨라스케스의 정교한 인물 표현과 수르바란의 엄숙한 분위기, 빛과 어둠의 대비는 곤잘레스가 추구하는 현대적 초상화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전문 화가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세비야의 시장에서 초상화를 판매하고 결혼식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미술 석사학위를 마친 뒤에는 우엘바의 화장품 가게에서 일했으며,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보모로, 라퀼라에서는 치과 조수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후에는 미술 수업을 진행하면서 작품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우엘바의 새로운 박물관을 위한 바로크 회화 복제 작업에도 참여하며 고전 회화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과정은 그녀가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익히는 동시에 현대인의 삶과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사진 1. 스페인 출신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의 작품. 고전적 초상화 구도와 현대적인 패딩 의상이 결합한 독특한 조형세계를 보여준다.

 

고전 초상화 속에 등장한 현대의 패딩 재킷

 

니에베스 곤잘레스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서로 다른 시대의 미적 요소가 하나의 화면에 공존한다는 점이다.

스페인 출신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 작품 릴리 알렌 초상화

그녀는 스페인 바로크 초상화의 전통적인 구성과 인물 표현 방식을 활용하면서도 등장인물에게 현대적인 의상을 입힌다. 특히 부피감이 강조된 누빔 패딩 재킷은 그녀의 회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적인 소재다.

 

과거 귀족이나 성인의 초상화를 연상시키는 엄숙한 인물들이 선명한 색상의 패딩을 착용한 모습은 낯설면서도 묘한 친숙함을 전한다.

 

고전적인 배경과 현대의 패션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대비는 단순한 유머나 시각적 충격에 그치지 않는다. 인물을 통해 시대의 정체성을 표현해 왔던 초상화의 전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의 초상화가 의복과 장신구를 통해 인물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다면, 곤잘레스의 작품에서는 현대의 패션이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조형 언어로 기능한다.

 

그녀는 2026년 초 로마의 T293 갤러리에서 개인전 《성스러운 머리카락(Sacred Hair)》을 개최했다.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였으며,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과 함께 소개되었다. 6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리처드 헬러 갤러리(Richard Heller Gallery)에서 개인전을 이어갔다.

 

이처럼 유럽과 미국을 넘나드는 전시 활동은 그녀의 독창적인 구상 회화가 국제 미술계에서 관심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국 대중음악의 개성 있는 목소리, 릴리 알렌

 

이번 앨범의 주인공 릴리 알렌은 1985년생 영국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다.

 

그녀는 특유의 개성 있는 음색과 솔직한 가사, 대중적인 멜로디를 결합한 음악으로 영국 팝 음악계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구축해 왔다.

 

2006년 발표한 데뷔 싱글 《Smile》은 영국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며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같은 해 발매한 첫 번째 정규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했고,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얼터너티브 음악 앨범 부문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2009년 발표한 두 번째 정규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2010년에는 브릿 어워드에서 여성 솔로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

 

2014년 세 번째 정규앨범 역시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이후 2018년 발표한 네 번째 앨범은 영국 앨범 차트 8위에 올랐다. 앞선 작품들과 비교하면 상업적 성과가 다소 주춤한 모습이었지만, 음악적 표현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2025년 발표한 다섯 번째 정규앨범 《West End Girl》은 영국 앨범 차트 2위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릴리 알렌은 브릿 어워드 수상 경력 외에도 그래미 어워드와 영국의 권위 있는 공연예술상인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드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음악과 연기를 넘나드는 그녀의 활동은 다양한 예술 분야를 연결하는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West End Girl》, 한 장의 초상화로 완성된 음악의 얼굴

 

니에베스 곤잘레스가 그린 릴리 알렌의 초상화는 앨범 《West End Girl》의 시각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림 속 릴리 알렌은 푸른색 계열의 풍성한 패딩 재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짧은 검은 머리와 정면을 향한 시선, 차분한 표정은 고전 초상화의 인물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하체를 드러내는 짧은 의상과 검은색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흰색 부츠는 이 초상화가 현대의 인물을 표현한 작품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상체를 감싸는 커다란 패딩의 부피감과 비교적 가볍게 드러난 하체 사이의 대비는 화면에 독특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푸른색 패딩의 화려한 질감과 어두운 배경, 인물의 피부와 의상이 이루는 색채의 균형 역시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릴리 알렌의 표정이다.

 

화면 속 인물은 화려한 의상과 달리 과장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관람자를 응시하는 모습은 인물의 내면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는 노래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싱어송라이터의 특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곤잘레스는 릴리 알렌이라는 동시대 음악가를 고전적인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다시 등장시킴으로써, 음악가의 이미지를 하나의 독립된 미술 작품으로 완성했다.

스페인 출신 화가 니에베스 곤잘레스 와 작품 릴리 알렌 초상화

이번 앨범의 또 다른 매력은 음반 커버의 구성 방식에서 발견된다.

 

《West End Girl》의 앞면과 뒷면을 펼쳐 보면 하나의 인물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

 

앞면에는 릴리 알렌의 상반신이 중심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뒷면에는 하체와 물방울무늬 부츠가 등장한다. 앨범을 펼쳐 보거나 내지의 이미지를 확인하면 비로소 인물의 전신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구성은 음반을 단순히 보관하거나 재생하는 음악 매체가 아니라, 직접 펼쳐보고 감상하는 시각적 대상으로 만든다.

 

작품을 처음 마주할 때는 패딩을 입은 인물의 상반신에 시선이 머물지만, 이미지를 확장하면 패션과 자세, 인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새롭게 읽힌다.

 

특히 전신 초상화에서 상체의 풍성한 실루엣과 길게 뻗은 다리, 물방울무늬 부츠가 만들어내는 형태적 대비는 고전적인 초상화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다.

 

디지털 음원 서비스가 음악 소비의 중심이 된 시대에도 LP와 같은 실물 음반이 여전히 특별한 감상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음반을 펼치는 행위 자체가 그림을 감상하는 과정이 되고, 시각적 경험은 다시 음악에 대한 감상으로 이어진다.

릴리 알렌 2025년 앨범 “West End Girl” 앞, 뒷면 펼친 모습

음악과 회화가 서로를 기억하게 만드는 방식

 

음반 커버는 오랫동안 음악의 시대적 분위기와 예술적 성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음악가의 정체성을 상징했고, 때로는 화가의 그림이 음악의 세계를 보다 깊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릴리 알렌의 《West End Girl》은 이러한 관계를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앨범의 커버를 맡은 니에베스 곤잘레스는 고전 회화의 표현 기법으로 현대의 음악가를 그렸다. 음악가는 다시 그 초상화를 자신의 앨범에 담아 대중에게 선보였다.

두 사람의 작업은 서로 다른 예술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하나의 음반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

 

니에베스 곤잘레스의 그림을 통해 릴리 알렌의 음악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고, 릴리 알렌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림 속 인물의 시선과 표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고전 회화의 깊이와 현대 대중음악의 자유로운 감성이 만난 《West End Girl》.

이번 음반은 귀로 듣는 음악과 눈으로 감상하는 미술이 결합할 때 한 장의 음반이 얼마나 풍성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음반을 펼쳐 초상화의 전체 모습을 살펴본 다음, 릴리 알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그림 속 인물이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한 또 다른 감상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ㅣ최재우 | 문화예술기획 제이비엠 대표

 

음반 개요

  • 음반명: West End Girl

  • 아티스트: 릴리 알렌(Lily Allen)

  • 발매연도: 2025년

  • 구분: 다섯 번째 정규앨범

  • 장르: 팝

  • 앨범 커버 작가: 니에베스 곤잘레스(Nieves González)

  • 출신 및 활동 기반: 스페인 우엘바 출생, 그라나다 기반 활동

  • 커버 특징: 스페인 바로크 초상화 양식과 현대적인 패딩 의상을 결합한 릴리 알렌의 초상화

  • 주요 성과: 영국 앨범 차트 2위

 

음악 감상

Lily Allen – West End Girl 유튜브에서 감상하기
Lily Allen – Just Enough 유튜브에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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