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다시 쓰는 세계》, 상실의 아픔을 넘어 새로운 관계와 회복의 가능성을 그리다
공연창작소 공간이 오는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서울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에서 연극 《다시 쓰는 세계》를 선보인다.

이번 공연은 2026년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장애예술 활성화 지원사업 문화예술 향유 부문 선정작으로, 2025년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작 송한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박경식 연출이 새롭게 창작한 두 번째 프로젝트다.
《다시 쓰는 세계》는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살아가는 농인 여성 ‘유림’의 일상과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가정에서 경험한 소외와 상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주하는 갈등과 고통을 통해 한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다시 구성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농인 여성을 독립적인 삶의 주체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상실의 기억에서 시작되는 네 가지 이야기
작품은 엄마의 죽음 이후 홀로 살아가는 유림이 마주하는 다양한 관계를 ‘내면의 존재’, ‘타인’, ‘동료’, ‘이웃’이라는 네 가지 에피소드로 풀어낸다.

유림에게 엄마의 부재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되살아나는 상실의 기억은 현재의 삶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무대에서는 현재와 과거의 시간이 교차하고, 인물의 기억과 감정이 파편적인 장면으로 연결된다. 사건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전통적인 서사 방식 대신, 서로 다른 시간과 감각을 중첩시켜 유림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한다.
엄마와 아빠의 기억은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며, 유림이 경험하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극적 장면으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관객들이 유림의 삶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이 경험하는 감정의 흐름과 기억의 층위를 함께 따라가도록 한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질문을 던지다
《다시 쓰는 세계》는 개인의 상처와 회복을 다루면서도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해 온 사회적 기준과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작품의 제작 의도에는 장애인을 감동이나 교훈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관습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배려’, ‘정상성’,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규범이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규정하거나 배제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일방적인 보호나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오해와 낙인, 자기방어와 갈등을 경험하면서도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 가는 동시대의 존재들이다.
연극은 장애를 하나의 소재로 소비하는 대신, 장애인 당사자가 자신의 언어와 감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모습은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예술적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농인·청인 배우들의 협업으로 확장하는 연극적 언어

이번 공연에는 농인 배우 이소별과 방대한, 청인 배우 엄태라를 비롯해 신정은, 노유라, 김태훈, 박성환, 서동현이 출연한다. 이소별이 중심인물 유림을 맡고, 엄태라와 방대한이 각각 엄마와 아빠의 형상을 연기한다. 신정은과 서동현은 타인으로, 노유라와 김태훈은 작품 속에서 만나는 동료로, 박성환은 이웃으로 등장한다.

배우들은 네 가지 에피소드 속에서 서로 다른 관계와 감정을 표현하며 유림이 마주하는 세계를 입체적으로 구성한다.
공연창작소 공간은 이번 작업을 통해 농인과 청인이 각자의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동등하게 협업하는 창작 환경을 지향한다.
수어와 농문화를 연극의 독자적인 예술 언어로 확장하고, 농인 예술가가 단순한 출연자를 넘어 창작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이는 장애인 예술의 접근성과 참여 기회를 넓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신체적 감각과 표현 방식이 공연예술의 미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도이기도 하다.
“고통을 견디며 누군가를 위로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이야기”
극작과 연출을 맡은 박경식 연출은 이번 작품에 대해 “누구나 겪는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견뎌가며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이어 “농인 여성이라는 설정을 통해 사회적 시선과 편견, 고립을 더해 한 인간이 스스로 독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며 “고통을 이겨내며 누군가를 위로하는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 그 성숙의 여정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에서 중요한 것은 상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지닌 채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유림이 마주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상처를 남기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다시 세상과 관계를 맺도록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다시 쓰는 세계》가 보여주는 회복은 고통을 잊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고통과 기억을 자신의 삶 속에 새롭게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연창작소 공간, 동시대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 모색
이번 공연을 제작하는 공연창작소 공간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무대 공간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며, 동시대 사회의 문제를 공연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는 창작단체다.
연극의 본질과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제를 바라보고 사유하는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예술적 실험과 관객과의 소통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
《다시 쓰는 세계》 역시 이러한 창작 방향의 연장선에 있다.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관계를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누군가를 잃은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도 하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연극 《다시 쓰는 세계》는 한 농인 여성의 개인적인 기억과 일상을 통해 상실 이후의 삶과 인간관계의 의미를 되묻는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무대가 관객들에게 어떤 울림을 전할지 기대를 모은다.
공연 개요
공연명: 연극 《다시 쓰는 세계》
공연기간: 2026년 10월 29일(목) ~ 11월 1일(일)
공연장소: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공연시간: 평일 오후 7시 30분 / 토요일 오후 3시·6시 / 일요일 오후 3시
극작·연출: 박경식
출연: 이소별, 엄태라, 방대한, 노유라, 박성환, 신정은, 김태훈, 서동현
주최·주관: 공연창작소 공간
후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티켓가격: 전석 40,000원
할인: 사회초년생 할인, 청년 할인, 복지 할인 등
예매: NOL 티켓, 전화예매(단체·휠체어석)
공연문의: 010-6784-0402
공식 인스타그램: @gongga_n
2025년 공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의 무대 장면. 이번 작품 《다시 쓰는 세계》는 전작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됐다. 사진=공연창작소 공간 제공.
전작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공연 장면. 인물의 기억과 감정을 다양한 연극적 표현으로 담아낸 무대. 사진=공연창작소 공간 제공.
전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