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희,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리다…20년 ‘RETINA’에 새긴 기억과 아름다움
한 소녀에게 그림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꿈이 아니었다. 오래전 아버지가 건넨 한 번의 기회에서 시작됐다.
“내가 그림을 그리도록 시작해주신 분은 아버지이십니다.”

이수희 작가는 자신의 그림 이야기를 꺼낼 때 아버지를 먼저 떠올린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 학교장이었던 아버지가 처음 그림그리기대회에 데려갔다. 대회를 마친 뒤 먹었던 짜장면, 그리고 편식이 심했던 딸에게 “다 먹었니?”라고 묻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학교 앞 성당과 등굣길에서 만났던 수녀, 사생대회와 야외 스케치, 나무와 푸른색의 기억도 그의 화면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수희 작품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가 바로 이 ‘기억’이다.
망막에서 마음으로 들어가는 그림
이수희 작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이름은 ‘RETINA’, 즉 ‘망막’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망막은 단순한 신체 기관에 머물지 않는다. 눈으로 본 세계가 기억과 감정, 상상을 거쳐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나는 출발점이다.
작가는 “저의 그림은 눈은 볼 것이고 마음은 말할 것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나무는 실제 자연의 나무이면서 기억을 품은 생명체가 되고, 여성은 현실의 인물이면서 작가 내면의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꽃과 장미, 나비, 푸른 숲과 여성의 얼굴은 서로 다른 소재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세계로 이어진다.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RETINA’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무 역시 중요한 상징이다.

짙은 푸른색과 흰 나무가 대비되는 작품에서 가지와 줄기는 혈관이나 신경처럼 화면 전체로 뻗어나간다. 나무 사이에는 사람이 서 있고, 그 주변으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RETINA-생명의 나무〉에서는 나무에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난다. 땅과 줄기, 꽃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생명과 성장의 이미지를 만든다.
2026년 작품 〈RETINA tree-Healing Love〉에서는 거대한 나무 아래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를 “레티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만나는 마음을 보듬는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나무는 풍경에서 출발해 기억이 되고, 사람을 품는 공간이 되며, 사랑과 치유를 상징하는 존재로 확장된다. 작가는 이 ‘RETINA’ 작업을 약 20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알폰스 무하의 아름다움, 이수희의 언어로
이수희의 인물 작품에서는 아르누보 특유의 장식적인 선과 유려한 형태가 눈에 띈다.

작가 역시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를 좋아하고 자신의 작업에 참고하고 있다고 밝힌다. 특히 긴 머리카락과 꽃, 장식적 선으로 둘러싸인 여성들은 무하의 세계를 연상시키면서도 이수희만의 기억과 색채를 품는다.

〈RETINA-여정1〉, 〈RETINA-따뜻한 여유〉, 〈RETINA-Love〉 등의 여성들은 정면을 바라보거나 생각에 잠기며, 때로는 자전거와 함께 등장한다. 화려한 장식 속에서도 인물의 표정에는 고요와 사색이 남아 있다.
‘RETINA-Love’ 연작에서는 작가가 생각하는 여성의 아름다움도 드러난다. 그는 대한민국을 빛낸 여성들과 자신이 생각하는 멋진 여성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RETINA-Love, 소프라노〉에는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문장이 함께한다.
이는 이수희의 그림을 바라보는 방법과도 닮았다. 처음에는 여성과 꽃, 화려한 색채가 눈에 들어오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화면 곳곳에 겹쳐진 선과 작은 이미지들이 드러난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단순히 예쁜 외형이 아니다. 시간을 들여 바라보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RETINA-Look ‘화성의 아름다움’〉에 담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아내는 것은 또한 보아내는 자의 몫이다”라는 문장 역시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기억에서 사랑과 치유로
이수희의 ‘RETINA’는 한 가지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푸른 나무와 인물에서 출발해 장미와 여성, 나비와 생명의 나무로 확장됐으며, 〈RETINA-Spring〉에서는 분홍색과 흰 꽃, 자유롭게 흩어진 색채가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본다’는 행위다.
눈으로 세상을 보고, 기억을 다시 바라보고, 마음속 이미지를 화면으로 끌어낸다. 그래서 ‘RETINA’는 작품 제목인 동시에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수희는 “예술을 미래를 향한 지속적인 아름다운 그림으로 이어가고 싶다”며 “아름다움은 세상을 구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했던 첫 그림대회에서 출발한 그의 그림은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 ‘RETINA’라는 하나의 세계가 됐다.

아버지의 기억, 등굣길의 나무, 파란 옷의 수녀, 자연과 꽃, 여성의 얼굴이 화면에서 다시 만난다. 기억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사람을 품고, 꽃은 사랑과 치유로 이어진다.
이수희가 오랫동안 그려온 ‘RETINA’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마음속에 남기며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그 질문에 그림으로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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