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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08] 오탁번의 "죽음에 관하여"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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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하여

 

오탁번

 

1

왼쪽 머리가

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

나뭇가지 휘도록 눈이 내린 세모에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나는 넘어졌다

 

하루에 링거 주사 세 대씩 맞고

설날 아침엔 병실에서 떡국을 먹었다

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의사가

첩자처럼 병실을 드나들었다

 

수술받다가 내가 죽으면

눈물 흘리는 사람 참 많을까

나를 미워하던 사람도

비로소 저를 미워할까

나는 새벽마다 눈물지었다

 

2

두통이 가신 어느 날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죽음에 관하여 _ 오탁번 시인 [이미지:류우강 기자]

  [해설]

 

   우리의 전통인 해학성 혹은 골계미

 

  이 시를 처음 읽고 요즈음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인 깜놀혹은 ‘멘붕’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1943년생이시니 쉰아홉 살이면 시집 『벙어리장갑』을 낸 2002년의 정초였을 것이다. 설날 아침에 병원에서 떡국을 드신 모양이다.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원 세상에, 환자복 바지 속의 거시기에 힘이 뻗어서 순간적으로 커지고 만 것이다. 그다음 행이 기막히다.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고 고백하는데, 나라면 이런 일을 겪었어도 결코, 절대로 시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위로하지만(내게 아직도 남성성이 남아 있구나), 금방 비감에 사로잡힌다(이것을 언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은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져본다. 게다가 정초니 면회도 많이 올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부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헛나온다. ‘바지 하나 주세요라고 말했는데 발음은 바다 하나 주세요라고 튀어나온 것이다. 병세가 시인으로 하여금 발음을 잘못 하게 한 것일까? 시인의 말마따나 언어 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말이 그때 헛나온 것이겠지만 놀라운 시적 전환을 이룩한다.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 버렸다/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는 이 시의 결구는 오탁번 시인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명구이다.

 

  오탁번은 사라져버린 우리의 문학적 전통인 해학성(諧謔性)과 골계미(滑稽美), 익살과 풍자를 종횡무진 구사한 시인이었다. 1950년대의 전영경과 신동문, 「오적」과 「똥바다」를 쓴 김지하, 1980년 말과 90년대 초의 유하, 함민복, 김영승 같은 시인은 해학적인 시를 쓴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오탁번 시인은 시력(詩歷) 57년 내내 유쾌한 골계미의 정수를 정말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8년 뒤에 낸 ​『우리 동네』(시안, 2010)라는 시집에는 「운수 좋은 날」이란 시가 나온다. 지하철을 타고 깨다 졸다 하면서 가다가 을지로3가역에서 눈을 뜨니 바로 눈앞에 배꼽티를 입은 아가씨가 서 있는 것이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이응 ㆁ 같은/ 도토리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옴쭉거리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의 젊은 날에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또렷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때는 시도 때도 없이 발기하여 참 곤란했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게 되었다. 시인은 그날의 배꼽 목격이 내심 얼마나 흐뭇했던지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입으로 회춘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이라고 고백한다. 시인의 용기가 부럽다.

 

  고전소설 『흥부전』을 보면 못된 놀부에 대한 묘사가 그야말로 배꼽을 잡게 한다. 『춘향전』의 첫날밤 장면이나 판소리 여섯 마당 중 「변강쇠가」의 대본은 청소년이 보면 절대로 안 된다. 『고금소총』『촌담해이』『태평한화골계전』 같은 설화집을 보면 우리 조상이 포복절도할 이야기를 참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의 다 낯을 붉히게 한다. 시인이 돌아가신 지 3년이 다 돼 간다. 오탁번 시의 유쾌한 해학성을 그리워하는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오탁번 시인]

 

  1943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철이와 아버지」,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처형의 땅」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를 정년퇴임했다. 시집 『오탁번 시전집』, 소설전집 『오탁번 소설』 1~6, 학술서 『한국현대시사의 대위적 구조』, 평론집 『현대문학산고』『헛똑똑이의 시 읽기』『현대시의 이해』, 산문집 『시인과 개똥참외』『오탁번 시화』『두루마리』 등이 있다. 2023214일에 작고하였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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