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세상보기 : 시 ] 허난설헌(許蘭雪軒) / 홍영수

허난설헌(許蘭雪軒)
홍영수
난(蘭)의 향기여, 하얀 서설(絮雪)이여!
빈 종이에 눈물, 핏물 자국을 남기고
숨죽였던 차별의 시대, 아픈 성별의 상처를 안고
어찌타! 스물일곱의 짧디짧은 불꽃으로 사라졌는가.
여자의 말은 스치는 바람결에 흩날려 보냈던 때
치마의 허리춤에 시심을 띠로 두르고
저고리 옷고름엔 한 올 한 올의 시상을 동여매었지
시의 씨앗은 반도의 텃밭이 너무 좁아
드넓고 커다란 대륙으로 날아가 발아했고
단장의 고통과 슬픔을 두 번 겪으면서도
참척의 쓰린 아픔은 가슴에 심어 두고
좌표 잃어 다스리지 못한 심사엔 눈물 없이 울었지.
성의 차별과 다름으로 이목구비를 지우고
귀 닫고 입 닫은 정지된 시간 위에
반딧불이가 되어 찾아든 두 영혼이
붓끝에 깃든 넋이 되어 시의 호롱불을 밝혔지.
받침대를 잃어버린 흔들리는 삶에서도
겨울날의 눈보다 늦게 지고
낙화된 두 송이의 고독한 결함을 이겨내며
봄날의 꽃보다 먼저 피었지
못다 할 정은 뜨거운 앙가슴에 접어놓고
여인의 이름이 아닌, 시인의 숨결이 되어
천상의 붓끝에 흩날리는
두 개의 꽃잎 소리를 들었지
‘조선’이라는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억업에 가로막힌 허난설헌. 그녀는 두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의 아픔을 안고 스물일곱이라는 짧디 짧은 생을 마감했다. 두 자식을 먼저 보내면서 ‘눈물 없이도 울어야 했던’ 상처와 고독 속에 이목구비를 지워야 했던, ‘허난설헌’, 그렇지만, 그녀는 단순한, 허무나 절망의 시간만을 보내지 않았고, 한탄이나 비극의 울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비록 여인으로서, 서하지통(西河之痛) 속, 영혼이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도 어둠을 밝혀주는 ‘반딧불이’이자 ‘호롱불’을 붓끝에 매달고 두 남매를 위해 엄동설한의 눈보다 늦게 지고, 봄날의 꽃보다 먼저 피면서 핏물,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빈 종이에 시향을 불살랐다.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늘어져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차가운 달빛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 許蘭雪軒(허난설헌)의 <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 일부.
應知弟兄魂(응지제형귀) 너희 오누이 넋이야 응당 알지니,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어울려 놀겠지.
- 許蘭雪軒(허난설헌)의 <곡자(哭子)> 일부
여성을 옭매였던 시대적 배경과 두 자식을 가슴에 묻은 斷腸之哀의 아픔을 시로 승화시킨 그녀, 비록 짧은 생으로 마감했지만, 그녀의 시는 ‘조선’이라는 좁은 텃밭이 아닌, 드넓고 커다란 대륙으로 날아가 발아시켜 결코, 죽었을지언정 지나간 슬픔에 눈물을 낭비하지 않았고 ‘두 영혼’, ‘두 송이’, 두 개의 꽃잎‘과 함께 지금도 우리 곁에 시들지 않고 영원한 시인의 숨결로 피어오르고 있다.

홍영수 시인,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 한탄강문학상 대상
- 아산문학상 금상
-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지구의 유언장』, 자연과 인문, 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