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27] 이강의 "낙원으로"
낙원으로
이강
사내는 낙원으로 간다고 했지
벌거벗은 적도의 타악기가 낙원으로
광활한 몽골의 초원을 달리던 ‘마두금’이 낙원으로
인도의 ‘시타르’가 조지 해리슨을 따라 낙원으로
일본의 ‘샤미센’이 엔카를 업고 낙원으로
빈 필의 신년 음악회가 낙원에서
베를린 필의 폰 카라얀이 낙원에서
사내를 기다릴 것이라고 했지
사내는 낙원으로 간다고 했지
임헌정과 금난새가 낙원에서 악단을 조율할 때
김은선이 베를린 필에서, 성시연이 오클랜드 필에서
낙원의 알리바이를 증명했지
낙원의 악기들이
낙원에서 음악으로 소리를 찾을 때
사내는 낙원으로 간다고 했다
―『낙원상가』(한국문연, 2025)
[해설]
수많은 악기들로 이뤄진 낙원상가
이 시의 제목에서부터 나오는 ‘낙원’은 ‘낙원상가’에서 ‘상가’를 뺀 것이다. 악기들의 낙원이라고 봐도 되고 지상의 낙원이 그곳에 있다고 봐도 된다. 우리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우아, 여기가 바로 낙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낙원동에 있어서 낙원상가가 되었지만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는 악기들이 그곳에서 판매되고 있다.
제1연 “사내는 낙원으로 간다고 했지”는 “사내는 낙원상가로 간다고 했지”로 보면 된다. 이곳에서는 적도의 타악기, 몽골의 초원에서 연주되던 마두금, 인도의 악기 시타르, 일본의 샤미센도 구할 수 있다. 각종 음반도 구할 수 있다. 빈 필하모니아의 신년 음악회 연주 음반을, 베를린 필하모니아의 지휘자 카라얀의 모든 음반을 구할 수 있다. 임헌정이 지휘한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을, 금난새가 지휘한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김은선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니아에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3번을 지휘한 것도 들을 수 있다.
성시연은 게오르그 솔티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 미국 보스턴 심포니 역사상 최초의 여성 부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는 경기필하모닉을 이끌면서 국내 국공립 오케스트라 첫 여성 상임지휘자 겸 예술단장이란 기록을 세웠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와 스페인 세비야 왕립 오케스트라 수석 객원 지휘자를 했다.
제5연 2행까지는 정보의 전달인데 제5연 마지막 4행에서 시인은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낙원의 알리바이를 증명했지/ 낙원의 악기들이/ 낙원에서 음악으로 소리를 찾을 때// 사내는 낙원으로 간다고 했다”고. 악기나 음반을 사러 낙원상가로 간다는 것은 낙원으로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낙원으로 갈 수 있다. 낙원을 살 수 있다. 낙원에서 살 수 있다. 이강 시인, 중앙고등학교를 나왔으니 낙원상가를 거쳐 학교에 갔을 것이다. 그래서 「낙원 인력시장」「낙원떡집」「낙원식당」「악기 수리장인 배기수 씨」「대여 악기」「낭만극장」「색소폰 수리점」「낙원상가의 힘」「낙원으로 간다―기형도」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서정주를 키운 것은 8할이 바람이었지만 이강을 키운 것은 9할이 낙원상가였다.
[이강 시인]
1960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튀르키예과,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2020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22년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2023년에 첫 시집 『기형도』를 펴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