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155] 지희선의 "어미의 사계"
어미의 사계
지희선
여름
만 사 년 이십 일을 이쁜 짓 다하더니
비 오던 초여름 날 내 손 놓고 떠났고나
실실이 초여름 비 내리면 다시 괴는 눈물비
가을
단풍은 단풍대로 은행은 은행대로
제각기 속울음을 토해내는 가을날
하늘엔 솔개 한 마리 속울음도 잊었다
겨울
함박눈 흰나비 떼 온 천지에 휘날리면
깊은 산사 솔가지 쩌엉 쩡 부러지고
눈송이 그 가벼움마저 천근으로 앉는 밤
봄
봄빛도 눈부셔라 반쯤 눈뜬 민들레꽃
길 가던 하얀 나비 날갤 접고 앉는구나
아가야, 네 영혼은 어디에 날갤 접고 앉았나
—『L.A. 팜 트리』(도서출판 동경, 2025)

[해설]
아픔을 승화시키는 방법
1983년에 미국으로 이민 간 지희선 시인의 시조집에서 읽은, 4수로 되어 있는 이 시조는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고, 미국으로 문자를 보내게 했다. 답이 왔다. 급성 임파선 백혈병. 발병하고 한 달 만에 갔어요. 저는 아이를 잃은 많은 엄마 중 하나일 뿐이죠. 아픔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인들은 인간이 겪는 아픔 중에 가장 큰 아픔이 자식을 잃는 아픔이라고 생각하여 ‘慘慽’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참과 척, 두 글자 다 심(心)방변이고 참혹할 참에 슬플 척이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은 참혹한 슬픔이라는 것이다.
태어나 만 4년 20일을 살다 간 자식은 “이쁜 짓 다하더니” 비 오던 초여름 날 내 손을 놓고 먼 곳으로 가버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세월이 수십 년이 흘렀어도 아이가 죽은 날이 오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뒤부터는 가을이 되어 단풍나무가 붉게 물드는 것을,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것을 제각기 속울음을 토해내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하늘을 선회하는 솔개를 본 것인가. 솔개는 울음을 토하지 않는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겨울에는 소나무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지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나무도 가지가 뚝 부러지면 아플까? 나는 그때 내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는데.
봄이 왔다. 꽃이 피니까 나비가 꽃을 보고 날아온다. 반쯤 눈뜬 민들레꽃을 보고 길 가던 하얀 나비가 날개를 접고 그 앞에 앉는다. 엄마는 “아가야, 네 영혼은 어디에 날갤 접고 앉았나” 하고 상념에 잠긴다. 아아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귀엽기만 한 그 모습으로 간 아이가. 부모-자식은 이런 인연인 것을.
[지희선 시인]
경남 마산 출생. 《현대시조》《수필과 비평》《에세이 문학》으로 등단. 1999년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미주한국문인협회 부회장 및 시조분과위원장 역임. 《코리아아트뉴스 》미주 발기인. 성 토마스 한인천주교회 한글학교 교사. 《미주가톨릭문학》 편집국장.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청춘의 별을 헤다-윤동주』『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