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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30] 김강호의 ‘밑줄’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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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김강호

 

구겨진 신문을 펴자 솟구치는 전쟁 소식

포연에 묻힌 청춘들 곤두박인 진흙 뻘엔

신음이 검붉게 터져 불길처럼 번진다

 

눈뜨고 읽을 수 없는 에일듯한 내력들이

덜컹이며 내달리는 협궤열차 같아서

, 차마 읽지 못하고 먼발치만 보고 있다

 

피 젖은 들꽃들이 흐느끼는 드네프르강

실체적 진실마저 쓸려간 긴 강둑엔

길 잃은 영혼들 모여 천둥 울음 울고 있다

 

피눈물 흘러가서 흑해에 잠겨들 때

종전을 위한 기도가 줄임표로 놓이고

평화에 긋는 밑줄도 죽은 듯이 멈췄다

밑줄_ 김강호 시인 [ 이미지 : 류우강 기자]

밑줄 ― 전쟁의 기록 위에 핏물로 그은 선

 

나는 이 시를 한 장의 신문에서 시작했다. 구겨진 종이를 펼쳤을 때, 활자 사이로 피 냄새가 솟구쳤다. 그것은 단순한 전쟁 보도가 아니라, 인간의 절망이 활자로 응고된 얼굴이었다. 신문은 언제나 사실을 말하지만, 그 사실의 이면엔 살아 있는 고통이 묻혀 있다. 나는 그 고통을 읽는 대신, ‘밑줄을 그었다. 그것은 기록을 강조하기 위한 밑줄이 아니라, 차마 읽지 못한 진실의 선이었다.

 

이 시는 나의 눈앞에서 펼쳐진 전쟁의 서사이자, 동시에 인간의 역사에 대한 윤리적 응시다. 협궤열차의 덜컹임은 시대의 심장 소리였다. 그 안에서 나는 피와 진흙으로 범벅된 청춘들을 본다. 그들의 신음은 종이 위에서 검붉게 번졌고, 나는 그 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읽을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문장들, 그것이 이 시의 출발점이었다.

 

드네프르강과 흑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곳은 문명이 피를 흘려 만든 기억의 강이다. 나는 그 강둑에서 길 잃은 영혼들의 울음을 들었다. 그들은 이름 없이 사라진 병사들이고, 잊힌 평민들이며, 시대가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의 울음이 내 귀에 닿을 때,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되었다. 시란 결국 듣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의 평화에 긋는 밑줄도 죽은 듯이 멈췄다는 문장은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과연 우리는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수많은 생명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 세계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너무 쉽게 말해지고, 너무 쉽게 지워진다. 나는 그 단어를 함부로 쓰지 않기 위해, 밑줄을 긋고 펜을 멈추었다. 그 멈춤 속에 시가 시작된다.

 

「밑줄」은 결국 읽지 못한 것들에 대한 시다. 나는 신문을 읽지 못했고, 전쟁을 말로 옮기지 못했다. 다만 그 자리에 밑줄을 그었다. 그것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록이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예의라 생각했다. 전쟁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침묵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나는 오늘도 그 밑줄 아래서, 꺼지지 않은 불길 같은 언어를 찾고 있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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