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04] 윤동주의 "투르게네프의 언덕"
투르게네프의 언덕
윤동주
나는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스매통,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襤樓), 찢겨진 맨발,
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곤소곤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1939.9.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정음사, 1955)

[해설]
1948년 1월 30일에 간행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고 1955년에 나온 증보판에 실려 있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세계문학사 전개 과정에서 산문시와 이야기시를 정착시킨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를 모티프로 하여 이 시를 썼다. 민음사 간 세계시인선 제43권은 제목이 아예 『투르게네프 산문시』이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교수를 역임한 김학수는 이렇게 번역하였다.
거지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어빠진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 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누더기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다지도 처참히 이 불행한 인간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빨갛게 부푼 더러운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란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 없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을 몰라,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두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스쳤다―그리고 그는 자기대로 나의 싸늘한 손가락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제여” 하고 그는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그것도 역시 적선이니까요".
나는 깨달았다―나도 이 형제에게서 적선을 받았다는 것을.
―1878.2.
―김학수 역, 『투르게네프 산문시』(민음사, 1997)
두 시 사이에는 60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는데 윤동주는 본인의 시가 투르게네프의 영향을 받아서 쓴 것임을 제목에서부터 분명히 밝히고 있다. 투르게네프가 휴머니즘에 입각해 쓴 이 시는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어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일종의 패러디(parody) 시를 쓰게 한다. 일본어 ‘간스메’는 ‘통조림’이다.
투르게네프의 시에서는 시적 화자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자비를 실천하였다. 거지의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고, 거지는 그 행위에 감격해 한다. 거지는 이미 적선을 받은 것이라고 고마워하였고 화자도 거지(형제)한테서 적선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악수가 두 사람 모두에게 정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투르게네프의 이 시를 잘 알고 있는 윤동주는 세 거지 소년이 불쌍해 “얘들아” 하고 불러보지만 아이들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보았을 뿐 금방 헤어진다. 윤동주는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눠본 사실을 몹시 안타까워한다. 세 아이와 화자 간에는 어떤 교류도 교감도 이뤄지지 않은 채 헤어지고 만다. 후회와 반성이 몰려오지만 이미 헤어진 뒤다. 이숭원 평론가는 『동주 시, 백 편』(태학사)에서 이 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아이들은 무서운 가난에 휩싸여 있었고 온갖 폐물만 짊어지고 있다. 거기에 비해 화자인 나는 두툼한 지갑에 시계까지 있을 것은 죄다 가지고 있다. 소유물의 있고 없음의 차이가 그들과 나를 커다란 거리감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물건을 내줄 용기도 갖지 못한다. 값싼 동정이 그들에게 굴욕감이나 거부감을 갖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들과 내가 손을 잡고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나의 처지가 지나치게 넉넉하다. 이러한 자신의 생활 양태를 몰각하고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자문하고 있다.”
윤동주는 학업을 닦는 내내 자신이 아르바이트나 가정교사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밝힌 바 없다.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쉽게 씌어진 시」에는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같은 구절이 보이는데, 부모님께 줄곧 학비와 생활비를 타 쓰는 것에 대해 송구스러워했다. 게다가 동포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많이 죽거나 다치고 있는데 학생 신분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 시를 쓴 시점은 연희전문 2학년 때로, 기숙사를 나와 북아현동과 서소문동 등지에서 하숙 생활을 하던 시점이다. 하숙은 주인집에서 밥을 해주었기에 자취생 신분과는 또 다르다. 마음 약한 동주가 길에서 넝마주이 소년들을 만나고 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괴로워하다 이 시를 썼다고 생각한다.
[윤동주 시인]
만주 북간도 용정촌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촌 송몽규의 영향을 받아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6개월 후에 교토 도시샤대학 문학부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부친이 사망 전보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갔더니 화장을 해 유골함을 내주는 것이었다. 가족은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그를 묻었다. 그해 6월 14일에 가족은 묘소 앞에 ‘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가 이 세상에서 시인으로 공식적으로 불린 첫날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