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70] 양애경의 "그리운 당신"
그리운 당신
양애경
지금 생각해 보면
샴푸로 긴 머리를 감기만 해도
온몸에서 꽃내음이 나던
그때
당신과 잘 걸
그랬으면
나의 제일 아름다웠던 몸과
당신의 제일 아름다웠던 몸이
만났던 기억이 몸에 남았을 걸
왜 그랬을까
결혼할 사람이 아니면 손도 잡으면 안 된다고
결혼
사람 일이 어찌 될 줄 알고
헤어지는 게 꼭 마음이 없어서가 아닌데
나란히 함께 걸었던 순간이라든지
나란히 함께 카페에 앉았던 순간에
살그마니 손 안에 당신 손을 담았던
기억이 남았으면 좋았을 걸
이제 할머니가 되어
소년이었던 당신을 그리워하네
그때 우리 둘의 몸에도
서로를 남길 걸 그랬어
—『엄마 손을 잡고 그 골목에 서 있네』(걷는사람, 2025)

[해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시집을 받고 바로 다 읽었습니다. ‘엄마’를 먼 세상으로 보낸 뒤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 있는 시편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어머니 장례식 때의 일들이 떠올라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고, 한숨을 내쉬기도 했고, 시집을 수시로 덮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읽고 또 읽은 시는 「그리운 당신」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소설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였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딱 한 번만’이었지만 ‘몸에 남은’ 사랑이었는데 그대의 시에서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몇 번이나 강산이 변한 그 까마득한 옛날 일을 그대는 회상하고 있습니다. 이뤄질 수도 있었는데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젊은 날의 “나의 제일 아름다웠던 몸과/ 당신의 제일 아름다웠던 몸”이 만났던 기억을 두 사람은 갖지 못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대는(시적 화자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덧 할머니가 되어 소년이었던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아, 50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상상 속의 소년은 아니겠지요. “그때 우리 둘의 몸에도/ 서로를 남길 걸 그랬어”라고 지금 그대는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어요! 만리장성을 그 어느 하룻밤에 쌓았어야지 뭐한 겁니까. 안타까워 발을 구릅니다.
(고백. 그대의 등단작을 제가 좋아하여 학생들에게 거의 매학기 복사해 나눠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으니 이 또한 신기한 일입니다.)
[양애경 시인]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사랑의 예감』『바닥이 나를 받아주네』『내가 암늑대라면』『맛을 보다』『읽었구나!』를 냈으며 김종철문학상, 풀꽃문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영상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시힘, 화요문학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