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엽 개인전 ‘경계를 넘어서’… 상처 입은 인간에서 포스트휴먼으로
권경엽 작가의 개인전 《경계를 넘어서(Posthuman: Beyond Boundaries)》가 9월 1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 마포구 갤러리초이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상처와 치유,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포스트휴먼의 시각으로 확장해 인간과 기계, 자연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본다. 전시에는 대표적인 ‘붕대’ 시리즈를 비롯해 사이보그, 자연과 결합한 인물,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룬 작품 등 총 30점이 출품된다.
권경엽의 회화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온 것은 ‘상처 입은 인간’이다. 붕대로 얼굴과 몸을 감싼 인물들은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모호한 지점에 머문다.
작품 속 붕대는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도구가 아니다. 상처를 감추는 동시에 그 흔적을 드러내며, 시간이 흐르며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들어 두는 상징적 매개로 기능한다. 존재와 부재, 상실과 회복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감각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 특히 주목되는 지점은 이러한 관심이 개인적 상처와 내면의 기억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사이보그’
전시 포스터에도 사용된 2026년작 ‘사이보그 화이트(Cyborg White)’는 이번 전시가 지향하는 변화의 방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백색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섬세하고 맑은 눈빛을 가진 인물의 얼굴 아래로 금속 구조와 기계적 관절이 이어진다. 인간적인 얼굴과 인공적인 신체가 하나의 존재 안에서 자연스럽게 결합돼 있다.
작품은 인간과 기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기존의 경계를 흔든다. 그러나 화면 속 사이보그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기계라기보다 오히려 연약하고 감정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은백색과 연보라, 분홍빛으로 구성된 부드러운 색조는 기술적 신체와 인간적 감성이 충돌하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을 완결되고 독립적인 존재로 규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술과 자연, 동물과 환경 등 수많은 비인간적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관계적 존재’로 제시된다. 인간과 기계, 자연과 인공, 생명과 비생명을 구분해온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이러한 시각은 포스트휴먼 담론과 맞닿아 있다.
기억과 망각,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의 문제
권경엽의 포스트휴먼은 단순히 미래기술이나 기계화된 인간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품 ‘기억과 망각(Memory and Oblivion)’에는 흰 천으로 얼굴과 머리를 감싼 인물이 등장한다. 화면 전체를 뒤덮는 옅은 분홍빛과 인물의 무표정한 얼굴은 기억과 소멸 사이의 불안정한 상태를 드러낸다.
몸과 얼굴을 감싼 천은 무엇인가를 보호하는 장치인 동시에 존재를 가리고 지우는 장막처럼 느껴진다. 관객은 화면 속 인물을 통해 기억하고 싶지만 잊혀지는 것, 감추고 싶지만 흔적으로 남는 상처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작가가 오랫동안 다뤄온 붕대 연작의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동시에 이번 전시에서는 그 질문이 개별 인간의 기억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불확실성으로 확장된다.
권경엽의 화면에는 포스트휴먼적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상처와 기억, 상실과 회복,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오래된 문제가 남아 있다. 따라서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 과정에 가깝다.
꽃과 새,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세계
권경엽의 작품세계는 기계뿐 아니라 자연과 동물로도 확장된다.

‘Under Cherry Blossom’에는 눈을 감은 금발의 인물과 화면 위쪽을 감싸는 연분홍빛 벚꽃이 등장한다. 인물과 자연은 분리된 대상이라기보다 하나의 정서적 공간 안에서 서로 스며든다.

‘Flying Blue Bird’에서는 파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금발의 인물, 푸른 새와 꽃이 함께 자리한다. 인간과 새, 식물이 각각 독립된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화면 안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특히 인물의 의상에 표현된 자연적 이미지와 주변을 부유하는 꽃, 날아드는 새는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기보다 다른 생명체와 함께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로 바라보게 한다. 이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온 전통적인 구분을 희미하게 만들고, 인간이 환경과 다른 생명체 속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탐색하려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창백한 인물들이 건네는 낯선 시선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는 특징 중 하나는 권경엽 특유의 색채다.
전시장 전경은 흰 벽과 회색 바닥으로 구성된 절제된 공간에 연분홍, 백색, 연보라 등 낮은 채도의 인물화가 배치돼 있다. 작품의 색감은 전시장 전체에 고요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Silver Bloom’, ‘Pale Glow Cyborg’ 등 비교적 작은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이어진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의 얼굴과 백색에 가까운 피부, 섬세하게 표현된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실재하는 인간의 초상처럼 보이면서도 현실에서 조금 벗어난 존재감을 드러낸다.

권경엽의 인물들은 대부분 강한 표정이나 극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정면을 응시하거나 시선을 돌리고, 때로는 눈을 감는다. 감정이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만큼 관객은 그 얼굴에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하게 된다.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표면 아래에는 상처와 소멸, 인간의 정체성과 기술의 문제라는 복합적인 질문이 놓여 있다.
‘경계를 넘어서’가 묻는 것
이번 전시 제목인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과 기계 또는 인간과 자연을 단순히 결합한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에게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에서 차지한다고 믿어온 위치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인공,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단단한 경계가 실제로는 훨씬 유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선에서 인간은 홀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과 자연, 동물과 환경,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고 공존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예술적 실천”으로 설명한다. 상처 입은 인간에서 출발해 기계와 결합한 사이보그, 다시 식물과 동물 등 비인간 존재와 연결되는 세계로 확장되는 권경엽의 회화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향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시대,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시는 오는 10월 5일까지 갤러리초이에서 계속된다.
전시개요
전시명: 권경엽 개인전 《경계를 넘어서(Posthuman: Beyond Boundaries)》
작가: 권경엽(Louise Kwon)
전시기간: 2026년 9월 10일(목) ~ 10월 5일(월)
오프닝 리셉션: 2026년 9월 12일(토) 오후 3시
장소: 갤러리초이(GALLERY CHOI)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17-7
문의: 02-323-49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