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시집 리뷰 ] 나병춘 시인, 시의 칼끝에서 피어난 푸른 감성 — 나병춘 시집 『섬달천 고양이』

시의 칼끝에서 피어난 푸른 감성 — 나병춘 시집 『섬달천 고양이』를 읽고
류안 시인
나병춘의 시는 종이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날카로운 책 모서리에 손끝이 금이 가고, 핏방울이 이슬처럼 맺히는 순간, 시는 “핏방울로 써라” 하고 속삭인다. 『섬달천 고양이』는 그 속삭임을 따라, 삶의 상처를 감각의 언어로 바꾸어낸 시집이다. 이 책은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시가 아니라, 감정의 본질을 탐색하고, 사물의 너머를 응시하는 시적 사유의 기록이다.
- 나병춘
날카로운 책 모서리에 살짝 금갔다
쪽을 열 때마다
합, 합, 합,
"바늘로 우물을 파라"
아차,

「종이의 변증법」은 시인의 내면을 향한 치열한 사유의 장이다. 펜촉은 환상통처럼 아프고, 시의 문장은 무림 고수의 눈빛처럼 서늘하다. “바늘로 우물을 파라”는 구절은 시를 향한 그의 태도를 압축한다. 여행도, 시쓰기도, 삶도 결국은 바늘로 우물 파듯 끈기 있게, 심장을 저미며 나아가는 일이다. 종이는 칼이 되고, 시인은 그 칼끝으로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찔러본다.
풍경
댕그렁
그 누가 매달아 두었나
아득히
「풍경」은 사물을 바라보는 두 겹의 시선, 즉 현미경과 망원경의 시선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허공에 매달린 청동 신발 한 짝이라는 작은 사물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일상의 파편이다. 작고 고요한 이미지 속에서 그는 “댕그렁 / 댕~” 울리는 소리를 포착하고, 그 울림의 정체를 묻는다. 이처럼 시인은 사물의 표면을 넘어서, 그 안에 숨겨진 감정과 기억의 결을 세밀하게 탐색한다.
하지만 이 시는 단지 미세한 관찰에 머물지 않는다. “그 누가 매달아 두었나 / 누구를 애타게 찾아”라는 질문은 시선을 먼 곳으로 던진다. 청동 신발이라는 사물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부재, 기다림, 혹은 잊힌 사연을 향해 시인은 망원경을 들이댄다. 적막을 울리는 그 울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정서적 파동이다.
이처럼 「풍경」은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현미경적 시선과, 사물 너머를 투시하는 망원경적 시선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시다. 나병춘은 작은 사물 하나를 통해 존재의 흔적을 되짚고, 그 흔적이 울리는 적막 속에서 인간의 감정과 삶의 본질을 포착한다. 시인은 말없이 매달린 청동 신발을 통해, 우리 모두가 매달아둔 기억과 그리움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바다가 섬이 보이면 됐어
아침 태양이 다시
떠오르면 됐어
정말 다행이야
이 모두 당신 덕분
「당신 덕분」은 짧은 형식 속에 깊은 울림을 담아낸 작품이다. 단 몇 줄의 언어로 삶의 본질과 고마움의 정서를 포착하며, 시인은 일상의 평범한 순간들을 기적처럼 노래한다.
“바다가 섬이 보이면 됐어 / 아침 태양이 다시 / 떠오르면 됐어”라는 구절은 자연의 반복되는 현상을 삶의 충분조건으로 제시한다. 섬이 보이고 태양이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삶은 감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시인의 인식은, 외부의 성취보다 내면의 수용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어지는 “정말 다행이야 / 이 모두 당신 덕분이야”는 시의 정서를 응축하는 고백이다. 여기서 ‘당신’은 특정 인물일 수도 있고, 삶을 가능케 하는 존재 일반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 존재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삶의 기적이 타인의 존재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되새긴다.
「당신 덕분」은 나병춘 시 세계의 따뜻한 결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절제된 언어, 담백한 감성, 그리고 깊은 사유가 어우러진 이 시는, 독자에게도 “당신 덕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며,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한다.
빨간 우체통
허름한 매무새의 노숙자
아무런 낌새도
찢어진 신문지가 바람결에
서너 살배기 웃음소리
「빨간 우체통」은 도시 뒷골목의 낡고 허름한 풍경 속에서 삶의 흔적을 포착하고, 그것을 환상과 우화의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시인은 현실의 파편들을 감각적으로 배열하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과 기적의 순간을 붉은 사과 한 알로 응축한다.
시의 배경은 “동굴 닮은 빨간 우체통”이 놓인 뒷골목 공원이다. 이 우체통은 과거와 현재의 소식들이 “얼굴 부비며 / 낙엽처럼 오래 발효하던” 장소로, 시간의 퇴적과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어” 있고, 아무런 소식도 없다. 이 침묵은 도시의 고독과 단절을 상징한다.
노숙자, 신문지, 박카스병, 맥주캔 등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버텨내는 존재들의 흔적이다. 시인은 이들을 연민이나 비애로만 바라보지 않고, “우화해버린 것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현실을 환상으로 전환한다. 찢어진 신문지가 바람에 흩날리고,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등장하는 순간, 시는 절망의 풍경 속에서 기적처럼 피어나는 생명과 희망을 노래한다.
마지막 구절 “붉은 사과 한 알”은 시 전체를 응축하는 상징이다. 그것은 삶의 가능성, 사랑의 흔적, 혹은 시적 환상의 결정체로 읽히며, 낡은 도시의 한켠에서 피어난 조용한 기적을 상징한다.

전남 장성 출신의 나병춘 시인은 1994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한 이후, 『새가 되는 연습』, 『하루』, 『어린 왕자의 기억들』, 『쉿!』 등 다수의 시집을 펴냈으며, 전자시집 『하루』와 시선집 『자작나무 피아노』 또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詩』 편집주간과 《아름다운작가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ECCA ‘해피드림’ 숲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숲해설가로도 활약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