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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360] 신달자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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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신달자

 

한 권의 나라가 태어났다

 

1899824

할아버지 도서관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가 번쩍

한 권의 책이 태어났다

도서관에서 어깨와 허벅지가 굵어졌고

종이 냄새와 책의 향기로 몸의 혈관이 꿈틀거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문자가 그의 호흡기에 저장되었고

동서양 지식의 영양으로 키를 길렀다

그의 몸엔 종이의 피가 책의 사상이 돌기 시작했다

책 속에서 책으로 살다가

책의 성을 쌓다가

도서관 사서로

국립도서관장으로

일생을 오로지 책이 되어 살았는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감히 어느 책벌레의 소행이었을까

종말엔 눈을 잃어 책 향기로 책을 읽었는데

어둠을 파내며 어둠 너머의 글자 속을 여행했는데

책을 글자를 더듬으며 더 깊이 들어갔는데

글자와 더 명료하게 마음을 나누었는데

그 무한이 그 사람 생의 향기가 되었는데

깊고 깊고 깊은 그 의식의 바다는

만리장성보다 높은 지상의 책으로의 성이었는데

1986614일 그의 심안의 눈까지 닫아 버렸는데

그의 책은 더 커져 가기만 하는데…….

 

 ―『종이』(민음사, 2011) 

문제적인 작가 보르헤스. 50대 중반 완전 실명한 후 평생 텍스트에 파묻혀 살았다. 무슨 생각에 미소 짓는 걸까. [사진 Levan Ramishvili]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해설]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축구를 잘하는 나라? 물론 디에고 마라도나 같은 축구천재를 낳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보르헤스를 낳은 나라다. 우리랑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로 중남미의 대국인데 그의 전집이 이 땅에서 번역 발간된 지도 20년이 넘었다. 신달자 시인은 인물시를 모아도 한 권의 훌륭한 시선집이 될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외에도 예수, 피천득, 이중섭, 박목월, 정세권, 조오현, 김대건,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한 권의 나라가 태어났다.” 맞는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다.

 

  이 시에는 보르헤스의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할아버지의 도서관에서 태어나 도서관 사서로 첫발을 내디딘 후 줄곧 도서관에서 책에 파묻혀 살았다. 유전적인 요인과 지나친 독서로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뒤에도 강연 활동과 구술로 저술 활동을 하였다. “1986614일 그의 심안의 눈까지 닫아 버렸는데/ 그의 책은 더 커져 가기만한다. 보르헤스의 아르헨티나란 한 나라의 작가가 아니다.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고 20세기 문학을 대표한다. 서양의 문학을 해체한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한다.

 

  신달자 시인은 보르헤스의 인간됨과 문학을 다양하게 조명하고 있다. 특히 어둠을 파내며 어둠 너머의 글자 속을 여행했는데” “글자와 더 명료하게 마음을 나누었는데” “만리장성보다 높은 지상의 책으로의 성이었는데라는 평가가 심장을 때린다. 눈까지 멀 정도의 독서와 집필! 이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외친 보르헤스의 소설은 동서고금 지식의 보물창고를 털어 금은보화를 자신의 동굴에 감추고선 새로운 연금술로 제련했다. 그래서 보르헤스만이 쓸 수 있는 천의무봉의 소설들을 탄생시켰다.

 

  칠레의 가브리엘 미스트랄과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이사벨 아옌데, 과테말라의 아스투리아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 콜롬비아의 마르케스, 페루의 마리오 요사와 세자르 바예호, 브라질의 조르지 아마두……. 중남미는 축구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환상적 사실주의는 서구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니 세계로 도약해야 한다. 보르헤스처럼 동서양 지식의 영양으로 키를 길러.

 

 [신달자 시인]

 

  경남 거창에서 출생, 부산에서 고교 시절을 보내고 숙명여대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평택대학교 국문과 교수,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숙명여대 명예교수와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장, 문화진흥정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1964년 《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으며,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게재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현대불교문학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 편운상을 수상하였고, 2012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였다. 1시집 『봉헌문자』에서 제17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까지, 그리고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수필집 『백치애인』『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고백』『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등을 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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