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 향기] 아버지의 자전거 - 김영희
나는 서울 성동구에 있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가 집에서 멀어 수업이 끝나고 걸어서 집에 돌아오면 다리가 아파서 한참을 주무르곤 하였다. 가끔은 그런 나를 위해 수업이 끝날 때 아버지께서 자전거를 타고 오셔서 나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아버지는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며 큰 도로를 유유히 시원하게 달리셨다. 아버지 허리 춤을 꽉 잡고 하늘을 나는 듯 구름을 따라 내 마음도 두둥실 떠갔다. 그런 날은 내 다리도 아프지 않아서 좋았다.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시원한 바람이 아버지 점퍼 속으로 들어가 점퍼는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때 아버지는 개선 장군처럼 최고로 힘세고 멋있어 보이셨다.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 모습은 감명 깊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길을 가다가 큰 자전거를 보면 아버지의 풍선처럼 부푼 점퍼와 함께 한 폭의 그림으로 생생하게 그려지곤 한다.
아버지의 딸 사랑은 각별했다. 표현은 잘 하지 않으셨지만 술을 드시고 오신 날은 내 뺨에 아버지 뺨을 비비곤 하셨다. 아버지 술 냄새는 싫지 않았다. 내가 귀가가 늦는 날은 밤길이 걱정되어 버스 정거장에서 기다리곤 하셨다. 내가 걱정하는 것들은 언제나 빨리 해결해 주셨던 아버지셨고 은연중에 나의 든든한 후원자셨으며 유난히 더 사랑해 주시던 분이시다.
결혼한 후 가족 중에 자전거를 나만 못 타서 늦게 나마 올림픽 공원의 '자전거 초보자 교육과정'을 마쳤다. 나는 겁이 잔뜩 나서 자전거에 올라타 핸들을 제대로 돌리지도 못하고 넘어지려고 하면 얼른 한 쪽 발을 내려 서 버리기 일쑤였다. 가끔 내 자전거 실력을 본다고 가족이 와서 구경하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뒤뚱뒤뚱하는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자전거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을 따라 수강생들과 한강 변을 달려 잠실운동장 아래쪽까지 자전거 졸업 여행을 다녀왔다. 그것은 나의 최초의 긴 자전거 여행이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작은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는 한때 밀린 대금을 받지 못해 결국 부도를 맞으셨다. 그 후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데 10년 쯤 걸린 것 같다.
아버지의 다리는 가늘고 약해 보였다. 특히 여름에는 아버지의 거의 뼈만 남은 가녀린 다리는 더욱 잘 드러났다. 그런 당신의 다리로 가족을 지키느라 한평생 애쓰며 살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자전거에서 내려 바퀴 가까이에 붙어있는 지지대를 발로 척! 소리 나게 내려서 비스듬히 세워두셨다.
그 작은 자전거 지지대는 우리 가족의 안녕을 책임져주는 아버지 삶의 든든한 지지대는 아니었을까? 아버지로 하여금 가족을 지킬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지지대.
내가 자전거를 배우려고 뒤뚱뒤뚱하며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은, 모든 것을 잃을 뻔했을 만큼 위태위태했던 아버지의 힘든 순간과 겹쳐져 내 가슴을 뜨겁게 울린다. 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자전거 타는 법을 터득하셨던 것처럼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고 가정의 평안을 지켜내셨다.
풍선처럼 바람이 가득 찬 아버지의 점퍼와 크고 낡은 자전거는 가끔 멋진 자가용으로 변신하여 그렇게 내 가슴에 커다란 행복의 풍선을 날리곤 하였다. 어릴 적 꿈 많던 아이 가슴에.
아! 그리운 아버지.
[수필 읽기]
어릴 적에 내가 탔던 아버지의 자전거는 내게 가장 편안하고 멋진 자가용이었다. 내가 성장해가며 부딪혔던 많은 일들을 아버지께서 언제나 빠르게 열심히 도와주셔서 큰 일 없이 잘 살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아플 때 녹즙 해 먹으라고 산에 다니시며 약초를 캐서 가방 가득 꽉꽉 담아 가져다 주셨고, 좋은 물 먹으라고 약수 터에서 약수도 매주 받아다 주셨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그 힘드셨을 일들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다 해내신 것이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헌신에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그동안 나는 아버지께 무엇을 많이 해드렸는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지 않고 혼자 참고 이겨낸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니었다. 가족 여행을 갈 때 함께 가시자고 말씀드리면 아버지는 거의 같이 가지 않으셔서 어머니와 같이 다녔다. 아버지께서 같이 가신 적은 몇 번 손에 꼽을 정도이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생각이셨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몇 년 후에 꿈을 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뒤쪽 멀리 아버지께서 웃으며 서 계셨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사람들 틈을 헤치고 아버지 앞으로 갔다. 그리곤 아버지를 꽉 안아드렸다. 그동안 못 전했던 마음을 가득 담아 안아드렸다.
아버지께서 사시는 동안 딸들에게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사랑했지만 많이 안아드리지 못했던 지난 날들. 사랑의 표현이 많이 부족했던 이 딸을 용서해주시기를.
아! 그리운 아버지.
김영희 수필가, 코리아아트뉴스 칼럼니스트, 문학전문 기자
충남 공주에서 태어남
수필가, 서예가, 캘리그라피 작가, 시서화 ,웃음행복코치,
레크리에이션지도자, 명상가 요가생활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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