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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97] 함진원의 "저녁은 먹고 가요"

이승하 시인
입력

저녁은 먹고 가요

 

함진원

 

수국 핀 늦밤에 안부를 물어도 되는지요

안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끔씩 드렸는데 모르셨나 봅니다

 

사는 것이 요즘 그럽니다만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 중인데

노력만 해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 팡파르를 울릴 때는 아니고요

열대야 견디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애를 써야 될 시간이 남아 있어

다행을 삼키며 즐겁게 웃습니다

웃음 사이로 밤을 모은 환한 말이 손잡아 주네요

 

고구마순 김치, 가지나물, 얼갈이 두부 된장국, 깻잎조림,

감자조림, 미역 오이냉국, 죽순나물, 꽈리고추 멸치조림,

무채지, 열무김치, 두부전, 묵은지 고등어 조림, 달걀찜

 

당신이 좋아하는 반찬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만

모처럼 따습게 저녁은 먹고 가요

 

—『가만히 불러 보는 이름』(문학들, 2025) 

저녁은 먹고 가요 _ 함진원 시인 [ 이미지 : 류우강 기자]

  [해설]

 

  평일에는 시를, 토요일에는 시조를, 일요일에는 동시를 평하고 있습니다. 어제 동시를 다루면서 너무 비관적으로 쓴 듯해 오늘은 같은 먹거리 얘기를 하되 밝은 시를 골랐습니다. 이 시의 화자는 사람들 사이의 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정을 쌓는 데 있어 저녁 대접만큼 좋은 것이 없음을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식당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밥 한술 뜨고 가면 당신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수 있을 테지요. 늘 먹던 반찬들인가요? 우아, 이렇게 맛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 종류의 반찬이!

 

  일본에서 꽤 오래 직장생활을 하다 귀국한 지인의 아들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본인이 한국인이어서 일본인들과 친해지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회식도 없고 초대도 없고 티 타임 같은 대화도 없어 몇 해를 회사에 다녀도 각자가 베일에 싸여 있더라는 겁니다. 회사에서는 오직 업무상으로 관계를 맺을 뿐,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민족적 특성을 봤다고 했습니다. 공중도덕에 대한 의식이 철저해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정신은 본받을 만하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그 반대가 아닌가요. 밥 한 번 같이 먹자. 한잔합시다. 저녁은 먹고 가요.

 

  화자는 당신의 근황이 궁금하고 간혹 여쭙기도 하지만 당신은 화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특히 화자는 당신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면서 삶의 고달픔을 호소하고 싶어 합니다. 사실,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고단합니까. 정을 나눌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녁 식사 자리에 뭘 내놓겠다고요? 고구마순 김치에서부터 달걀찜까지 열 가지가 넘네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신 시인이라 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보셨나 봐요. 제가 15일에 광주에 갔다 왔는데 전화를 한 번 드려볼 걸 잘못했습니다.

 

  [함진원 시인]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시 「그해 여름의 사투리 調」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인적 드문 숲길은 시작되었네』『푸성귀 한 잎 집으로 가고 있다』『눈 맑은 낙타를 만났다』, 연구서로 『김현승 시의 이미지 연구』가 있다. 기린독서문화교육원을 설립하고 기린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치유 글쓰기와 책 읽기 독서 모임을 하는 등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이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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