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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

[이승하의 하루에 시 한 편을 294] 김분홍의 "루빈의 컵"

이승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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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의 컵*

 

김분홍

 

버진로드를 행진하던 날

흘러내리는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지난 일을 고해하지 못했지

 

물구나무를 서면 감추고 있던 내가 쏟아질 것 같았지

 

유리의 투명한 척하는 자세와

컵에 담아두기만 하는 대화

 

명백한 과오지만 애써 숨기려 하는 이유는

 

무덤이 되기도 하고

모자가 되기도 하는

 

컵의 이중생활 때문일 거야

 

수납장을 열면

마주 보고 있는 컵들

 

어떤 모양으로 담겨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아무 데나 잘 담기는 거짓말을 따르다가 엎지르곤 했어

 

항상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투명해 본 적 없는 컵들

 

비밀이 쏟아지는 자세는 사절이야

 

그러니까 끝까지 감추려면

부르카를 벗을 수가 없는 거지

 

*컵과 사람의 옆모습을 이용해서 착시효과를 표현한 루빈의 그림.

 

 ̄『가족이라는 기후』(도서출판 상상인, 2025)  

루빈의 컵

  [해설]

 

  가족 간에도 비밀이 있구나

 

  루빈의 컵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심리학에서 자주 쓰는 그림으로 인간의 지각과 착시를 설명할 때 자료로 주로 사용된다. 명확한 흑백 대비를 이룬 가운데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본다. 검은 부분 중심으로 보면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옆얼굴의 형상인데 하얀 부분에 주목하면 위가 넓고 손잡이가 잘록한 술잔의 모습이다.

 

  김분홍 시인의 이 시는 상상력을 묘하게 자극한다. 버진로드는 결혼식 때 신부가 아버지나 신랑의 손을 잡고 입장하며 걸어가는 길을 뜻한다. 하지만 신부가 처녀가 아니어도 그녀가 걸어가는 길의 이름은 버진로드이다. “흘러내리는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지난 일을 고해하지 못했지는 바로 그 비밀을 숨기고 결혼한 이를 가리키는 것일 터이다.

 

  명백한 과오였고, 그것을 굳이 밝혀 결혼생활에 지장을 줄 필요는 없다. ‘무덤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을, ‘모자는 밝히면 손해이기에 감춤을 뜻한다. 루빈의 컵도 어찌 보면 사람의 얼굴이요 어찌 보면 술잔이 아닌가. 사람이 컵처럼 투명할 필요도 없고 엎어놓은 컵처럼 물구나무를 할 필요도 없다.

 

  구태여 없는 말을 지어낼 필요 또한 없다. “어떤 모양으로 담겨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아무 데나 잘 담기는 거짓말을 따르다가 엎지르곤 했어란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닐까. 공연히 거짓말을 지어내서 했다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분명히 생긴다. 또한 항상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투명해 본 적 없는 컵들이니 부모자식간에도 부부간에도 비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것이 신세대의 사고방식인가. 그렇다, 가족으로 살아가지만 현대인은 각자가 타인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식에게 그래, 결혼은 언제 할 거냐? 결혼한 자식에게 애는 언제 가질 거냐? 아기 키우고 있는 자식에게 둘째는 언제 볼 거냐? 감히(!) 이런 것을 물어볼 수 있는 부모가 몇 프로나 될까?

 

  비밀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래서 부르카(이슬람 여성의 의복으로 머리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덮고 눈 부위만 망사로 앞을 보게 하는 복식)를 벗을 수 없는 것이고, 벗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변했다. ! 비밀 엄수!

 

  [김분홍 시인]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2015<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20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 시집 『눈 속에 꽃나무를 심다』 『가족이라는 기후』가 있다.

 

이승하 시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나무 앞에서의 기도』『생애를 낭송하다』『예수ㆍ폭력』『사람 사막』 등

 

평전 『윤동주-청춘의 별을 헤다』『최초의 신부 김대건』『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지훈상, 시와시학상, 편운상, 가톨릭문학상, 유심작품상, 서울시문화상 등 수상

 

코리아아트뉴스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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