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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36] 김강호의 “초생달”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초생달

 

김강호

 

 

그리움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사진 설명이 없습니다.

초생달은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단순한 하늘의 기호가 아니라, 화자의 마음 깊숙이 누워 있는 그리움의 가장 첫 표정이다. 아직 둥글지 못한, 겨우 고개를 내민 가느다란 빛은 마치 사랑의 잔여물처럼, 혹은 감정의 깊은 밤을 건너온 뒤 남은 가장 여린 감정의 초입을 상징한다

초생달을 그리움 문턱쯤이라는 공간에 세워 두었는데, 이는 기억과 현실의 경계, 붙잡고 싶음과 놓아야 함 사이의 감정의 접경지대를 의미한다. 그 문턱 너머에서 초생달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지만, 그 고개는 사실 화자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나를 바라보는 달은 곧 내면화된 타자, 즉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이다. 그 달이 나의 뒤척임을 보고 흠칫 놀라돌아서는 순간은, 이미 떠나간 사랑이 다시는 나를 마주하지 못하는 순간이며, 동시에 화자 자신이 더 이상 과거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장면이다. 사랑은 떠났고, 떠난 사랑은 발걸음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달빛처럼 어딘가에 스며 있을 뿐이다.
 

눈물을 다 쏟아내고 / 눈썹만 남은 / 내 사랑이라는 후반부는 시의 정서가 가장 응축된 자리다. 눈물은 슬픔의 액체지만, 시에서는 사랑의 몸체가 사라진 뒤 남는 마지막 흔적으로 등장한다. 눈물조차 다 흩어지고 남은 눈썹은 지극히 가늘고 거의 사라질 듯한 존재이다. 이는 초생달의 형태와도 닮아있으며, 사랑이 거의 소멸한 뒤 남은 실오라기 같은 그리움의 상형문자이다. 달과 사랑, 눈썹과 눈물은 서로를 비추는 상징의 거울로 얽혀 시 전체를 감싸는 정조를 형성한다. 결국 이 시는 초생달이라는 사물에 소멸해 가지만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잔광을 담아낸 작품이다. 다 사라진 줄 알았던 사랑은 한 올의 눈썹처럼, 새벽하늘의 초승처럼 사라지는 대신 남는다. 붙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돌아서지만 완전히 떠나지도 않는 가느다란 존재가 바로 사랑이고,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가장 깊은 그리움의 빛이다.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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