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 향기] 벌레 - 맹난자
벌레
맹난자
욕조에 들어가 샤워기를 집어 든 순간 바닥에 시커먼 벌레가 보였다.
놈은 침입자에 놀란 탓인가, 꼼짝도 않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길이는 5cm쯤, 발이 많이 달린 그리마 속칭 돈벌레였다.
물을 틀면 곧장 하수구로 쓸려갈 테고... 어쩌면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손 가까이에 밥주걱처럼 생긴 발뒤꿈치를 미는 기구가 보였다. 간신히 놈을 거기에 앉히고 욕조 벽면에 밀착시켜 끌어올리기를 시도했다. 도르래를 탄 것처럼 어지러운가, 놈은 중간쯤에 이르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2차 시도도 실패였다. 필사의 탈출인가, 아니면 자포자기인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놈을 살려서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너를 다치지 않게 할 거야”
진정으로 말한 뒤 시퍼렇게 질린 몸을 주걱에 담아 다시 한번 시도했다. 벽면의 푸른 잔해가 놈의 발일 듯해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더욱 조심스럽게 놈을 욕조 벽면 위로 끌어올려서 간신히 타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사 관심을 떼고 나는 물을 틀어 샤워를 마쳤다. 놈은 화장실 나무문 옆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곤욕을 치른 뒤라서인지 힘이 없어 보였다. 다음날도 같은 장소에 그대로였다.
회복 중인가? 나는 그놈과 마주 바라보이는 변기에 앉아 녀석의 발을 살폈다. 대개는 30개라는데 중간이 뭉턱 빠진 듯해 보였다. 그 때문에 거동이 어려운 것인가? 심신을 어서 추슬러 제 갈 곳으로 갔으면 했다.
녀석은 다음날도 같은 장소에 미동도 않고 그대로였다. 몸통이 조금은 굵어진 듯 보였다. 그렇다면 놈은 갈 곳이 없나?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어떤 날의 내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아침 나는 눈 뜨기가 싫었다. 차라리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 주인공)처럼 벌레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캠퍼스의 푸른 잔디 길이 아닌, 시청 청사의 돌바닥을 때리는 내 구둣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다.
나는 놈에게 두 번째 말을 건넸다.
“이제는 눈에 띄지 말고 어디론가 가거라.”
연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여름, 외출에서 돌아와 서둘러 욕실에 들어갔다. 텅 빈자리. 놈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내 떠난 자리를 보는 듯했다.

[작가의 생각]
어느 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조로 들어간 지은이는 욕조 바닥에 돈벌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돈벌레가 죽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샤워기 물을 틀지 않고, 발바닥 미는 기구 위에 벌레가 올라 타도록 한 후 욕조 밖으로 옮기려고 하다가, 기구 위에 안전하게 안착하지 못해 그만 상처가 났는지 푸른 자국이 욕조 벽면에 생겼습니다. 지은이는 몇 번 더 시도하여 다리가 뭉턱 빠진듯한 돈벌레를 가까스로 욕조에서 꺼내 타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간신히 살아난 돈벌레는 기어서 화장실문 옆 모서리에 붙어있었는데 며칠을 꼼짝도 안하고 있으니 지은이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돈벌레의 행동을 살피지만 돈벌레는 미동도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지은이는 돈벌레에게 "이제는 눈에 띄지 말고 어디로든 가라."라고 말을 합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 지은이는 돈벌레가 있던 자리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벽면에 붙어서 꼼짝도 안하고 있던 돈벌레를 볼 때는 안전한 곳으로 가지 않아 안쓰러운 마음에 "어디든지 가라."라고 말을 했지만, 막상 돈벌레가 사라진 그 벽면을 보고는 텅빈 허무를 느낍니다. 있던 것이 사라진 후의 텅빔, 허무.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으려는 지은이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는 글입니다. 한때 그녀는 힘들었던 시기에 벌레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 텅빔은 연세가 많은 지은이 자신이 사라진 후의 텅빔으로 느낍니다.
삶은 영원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고통은 끊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길을 가다가 때대로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거나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은 땅속에서 기어 나와 길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지렁이들도 보게 됩니다. 가끔은 바쁜 사람들의 걸음에 지렁이들이 밟혀있는 것도 보게 됩니다.
또 줄지어 기어가고 있는 개미들을 보면 작은 부스러기를 들고 열심히 제 집으로 가져가고 있는 모습과 조금 큰 덩어리는 끙끙거리며 굴려서 옮기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는 일과나 그들의 일과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낮 미물이라고 생각되지만 지은이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그들은 분명 말을 알아듣고, 상대의 마음까지 읽는 것 같습니다.
돈벌레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며칠 동안 화장실문에 붙어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살려준 지은이에게 감사함을 느껴 지은이를 더 오래 보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돈벌레가 꼼짝도 안하고 그곳에 며칠 붙어있었겠어요? 지은이가 "어디든 가라."라고 한 말을 들은 후 돈벌레는 사라졌습니다.
불교의 생명존중사상에서는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초목까지도 불성(깨달을 수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유학교를 세운 페레의 교육 철학이며 그의 평전 제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배우 김혜자씨가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서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담은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꽃은 아름답지만 꽃으로 때려도 안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든, 무엇으로든 학대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환경존중은 생명존중이기도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생명은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너를 다치지 않게 할 거야"라는 지은이의 말을 돈벌레가 잘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 돈벌레가 잘 살아서 안전한 곳으로 가 생명을 이었기를.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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