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넘어 미래로 질주하다…허진 기획초대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
한 마리의 말이 앞발을 높이 치켜든다. 금세라도 화면 밖으로 뛰쳐나갈 듯한 몸에는 인간과 문명, 자연과 역사의 흔적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주변을 떠도는 검은 인간 형상과 동물들은 서로 부딪히고 뒤섞이며 낯선 생명체와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역동적인 말은 허진 작가가 지난 40년 동안 달려온 화업의 상징이자, 정년퇴직 이후 새롭게 펼쳐질 예술 여정을 예고하는 존재다.

세종대학교 세종뮤지엄갤러리는 허진 작가의 기획초대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The Man Named Horse)’를 오는 8월 30일까지 갤러리 1·2관에서 개최한다.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창작과 교육을 함께 이어온 작가의 정년퇴직을 기념하는 전시로, 초기작부터 미공개 작품, 최근의 ‘유목동물’과 ‘이종융합동물’ 연작까지 약 40년의 작업 세계를 조망한다.
전시 제목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에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를 넘어 질주해온 허진의 삶과 예술이 담겨 있다. 작가의 오랜 벗이 그의 그림과 행동방식, 인생을 두루 지켜본 뒤 붙인 이름이다.
“달려나가라고, 뛰어넘으라고, 당신은 도시 너머 들판과 지구 너머 행성, 신체 너머 영혼으로 달려나가는 존재라고.”
허진은 이번 전시를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는 종착점이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바라본다.
남종화의 화맥 위에서 전통을 흔들다
허진은 한국 남종화의 거장 남농 허건의 손자이자 소치 허련의 고손자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관통하는 화맥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그는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한지와 먹, 채색이라는 동양화의 재료를 기반으로 여러 장의 종이와 화판을 결합하고,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의 이미지를 한 화면에 충돌시키며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개척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1988년 동덕아트갤러리 단체전 ‘그대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1989년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에 이어 1990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첫 개인전 ‘묵시’를 열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 대표작 ‘J씨의 초상’은 여러 종이를 이어 붙인 가로 488㎝의 대작이다. 인물과 동물, 파편화된 풍경과 문양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겹치고 흩어진다. 단일한 시점이나 중심을 해체한 구성은 한 사람의 초상이라기보다 한 시대의 불안과 기억, 욕망이 뒤엉킨 집단적 초상에 가깝다.

1990년대의 ‘묵시’, ‘환(環)’, ‘유전(流轉)’ 연작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과 시대적 강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유전 7’에서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불려 나온 인물과 기호, 추상적 문양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을 떠돌며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던 ‘유전’ 연작을 집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과거는 무엇이며 역사는 현재에 어떤 그림자를 남기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꺼내 든다.
이름을 잃은 인간, 기다림 속에 멈춰 서다
허진의 시선은 역사를 지나 현대인의 내면으로 향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현대인의 초상’과 ‘익명인간’ 연작은 거대한 사회 구조 속에서 이름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포착한다.

‘익명인간-고도를 기다리며 2’에는 뚜렷한 표정도 이름도 없는 검은 인물이 등장한다. 붉은 꽃과 산수, 노란 동물과 여러 파편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인물은 그 풍경에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대인의 실존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스며든다.
작가는 인간을 억압하는 신체와 규율, 관습과 강박을 지속적으로 응시해 왔다.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을 가능성을 자연과 동물, 이동과 변신의 이미지에서 찾았다. 화면을 떠도는 인간과 동물은 정착하지 못한 존재이면서 새로운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유목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과 동물이 뒤섞인 새로운 생명체
2000년대 이후 허진의 작품에서 동물은 인간 못지않게 중요한 주인공으로 자리 잡았다. ‘유목동물+인간’ 연작에서는 말과 인간, 불상과 산수, 문명의 파편들이 자유롭게 교차한다.
‘유목동물+인간 2010-7’ 속 거대한 말은 힘차게 몸을 일으키고 있지만 곳곳이 노란 띠에 묶여 있다. 화면 주변의 인간 형상 역시 검은 실루엣으로 떠돌고 있다. 자유를 향해 달리고 싶은 생명력과 사회적 규율에 붙잡힌 현실이 한 몸 안에서 충돌한다.

최근의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연작에 이르면 동물들은 더 이상 특정 종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말과 하마를 비롯한 서로 다른 생명체의 특징이 결합하고, 인간과 기계, 자연과 문명의 이미지가 한 화면 안에서 뒤섞인다.
이는 단순히 기이한 동물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 작가는 순혈성과 획일화, 동질성만을 강조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나 이전에 없던 생명과 가능성
을 만들어내는 ‘이종융합’은 대립과 배제의 시대를 넘어설 하나의 상상력이 된다.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판단과 감각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에 허진의 화면은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결합과 인간적인 감각, 생명의 야성에 주목한다. 검은 형상과 은빛 선, 강렬한 색채가 화면 위에서 범람하며 계산된 질서를 밀어낸다.
40년의 회고가 아닌 새로운 출발
허진의 작업은 시대에 따라 형식을 달리해 왔지만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역사 속의 인간, 이름을 잃은 인간, 자연에서 멀어진 인간, 동물과 기계의 경계에 선 인간이다. 작가는 그 존재들이 무엇에 억압되고 어디를 향해 움직이는지를 끈질기게 그려왔다.
이번 전시는 초기의 ‘묵시’와 ‘유전’에서 ‘다중인간’, ‘현대인의 초상’, ‘익명인간’, ‘유목동물’, ‘이종융합동물’로 이어지는 변화의 궤적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관람객은 작품을 따라 걸으며 한국 사회의 변화와 동양화단의 확장, 그리고 한 예술가가 구축해온 시대정신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1991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에 부임한 허진은 30년 넘게 후학을 양성하면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창작과 교육이라는 두 바퀴를 함께 굴려온 시간 끝에서 그는 다시 말의 등에 오른다.
앞발을 들어 올린 말은 아직 출발선에 있다. 지난 40년의 기억을 등에 지고 있지만 시선은 화면 밖,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를 향한다. 은빛 풀밭에 바람이 일렁이듯 허진의 회화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종뮤지엄갤러리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허진 작가가 오랜 시간 이어온 작업 세계를 돌아보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리”라며 “축적된 화업과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예술의 방향을 함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허진 기획초대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는 8월 30일까지 서울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지하 1·2층 세종뮤지엄갤러리에서 열리며 관람료는 무료다.
전시 개요
- 전시명: 허진 기획초대전 ‘말이라 불리운 사나이’
- 영문명: The Man Named Horse
- 전시 기간: 2026년 8월 19일~30일
- 전시장소: 세종뮤지엄갤러리 1·2관
- 주소: 서울 광진구 능동로 209 세종대학교 대양AI센터 지하 1·2층
- 관람료: 무료
- 문의: 02-3408-4162·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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