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70] 김강호의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
김강호
당신 생각 지평선만큼 끝 모르게 길어서
수시로 둘둘 말아 가슴 깊이 묻어두고
남몰래 숨을 죽이며 보석이듯 꺼내 봤다
당신 생각 아파서 깊은 상처 동여맬 때
작설차는 연둣빛 울음으로 끓고 있고
뒷산 숲 오솔길쯤엔 싸라기별 쏟아졌다
당신 생각 끊임없이 잔물결로 밀려와
갯돌 같은 이야기를 자그르르 쏟으면
내 귀는 자루가 되어 넘치도록 받았다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
슬픔 깊은 이별 강 목을 늘린 새가 되어
강물이 붉어지도록 피 토하며 울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연정의 고백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한 인간의 시간과 기억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시조다. 시 속의 ‘당신’은 특정한 한 사람(어머니)일 수도 있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이상(理想)이나 지나간 젊음, 혹은 삶의 본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시에서 ‘당신 생각’은 감정이면서 동시에 존재를 흔드는 운명적 질문이라고 보면 좋겠다.
첫 수에서 “지평선만큼 끝 모르게 길어서”라고 한 것은 그리움의 길이를 공간의 끝과 겹쳐 놓았다. 지평선은 가까워 보이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경계이기에, 사랑 또한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끝내 다다를 수 없는 거리임을 드러낸다. “둘둘 말아 가슴 깊이 묻어두고”라는 표현에는 생각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보관하는 행위와, 상처 난 마음을 붕대로 감아 봉인하는 행위가 숨어 있다. 기억은 감추려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역설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둘째 수의 “작설차는 연둣빛 울음으로 끓고 있고”에서는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슬픔을 대신 우는 존재로 보았다. 끓어오르는 찻물은 마음속 고통의 온도이며, 연둣빛은 아직 완전히 시들지 않은 희망의 잔광이다. 이어지는 “싸라기별 쏟아졌다”는 구절은 숲길 위에 흩뿌려진 별빛이면서 동시에 부서진 기억의 파편을 뜻한다. 별은 본래 소망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너무 작고 흩어진 까닭에 이루지 못한 소망의 잔해다.
셋째 수에서 “내 귀는 자루가 되어”라는 표현은 가장 일상적인 신체 기관을 가장 소박한 사물로 바꾸어 놓았다.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는 갯돌처럼 둥글고 오래 물결에 씻긴 기억들이다. 그것들이 “자그르르” 쏟아질 때 귀가 자루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타인의 기억을 받아들이는 그릇으로 변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결국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생각을 담고 싶었다.
넷째 수 “이별 강”은 실제 강이 아니라 삶과 죽음, 만남과 상실 사이를 흐르는 시간의 강이다. “목을 늘린 새”는 그 강을 건너지 못한 채 건너편을 바라보는 영혼의 형상이며, 기다림의 자세가 극한까지 길어진 모습이다. 마지막의 “강물이 붉어지도록 피 토하며 울었다”는 표현은 과장된 비탄이라기보다, 사랑이 한 인간의 존재론적 중심을 뒤흔들 때 언어가 도달하는 최후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붉어진 강물은 저녁노을일 수도 있고, 상처 입은 마음일 수도 있다. 자연의 색과 인간의 고통이 하나로 겹쳐지도록 의도하였다.
이 시조의 중심에는 “생각은 과연 사라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사람은 이별 후에도 상대를 잊지 못한다.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지평선, 차, 별, 갯돌, 강물은 모두 내면 밖으로 걸어 나와 다른 얼굴을 한 채 말을 거는 존재들이다.
결국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이면」은 한 사람(어머니)을 향한 사랑의 노래이면서도, 인간이 끝내 놓지 못하는 기억과 존재의 흔적에 대한 명상이다. 소나기는 잠시 쏟아졌다 그치지만, 한 번 젖은 마음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나는 그 오래 마르지 않는 마음의 결을, 시조라는 형식 속에 깊고 길게 남겨 두고 싶었다.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