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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시조집] 기술과 시조의 만남, 새로운 문학의 지층을 열다; 천숙녀 시조집 『아카샤 - 레이어 제로, 기억의 첫 지층』

류우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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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시조의 정형성과 첨단 블록체인 기술이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하나의 시집 안에서 만났다. 천숙녀 시인의 신간 『아카샤 - 레이어 제로, 기억의 첫 지층』은 기술 시대의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탐색하며, 인간의 감성과 기술의 언어가 어떻게 조응할 수 있는지를 시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카샤 Akasha

시인은 한민족독도사관 관장으로서 40여 년간 독도 지명의 문화예술적 승화를 위한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이러한 경험은 시집의 중심 메타포인 ‘기억’과 ‘지층’에 깊이를 더하며, 블록체인의 불변성과 분산성이라는 기술적 특성과 인간의 진실과 기록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연결한다. 시인은 블록체인 시대의 최전선에서 ‘기억의 지층’ 위에 시조시인으로서 새로운 문학의 길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에 대한 초기 인식은 시인의 창작 동기를 자극했다. 처음에는 블록체인과 인공지능, Web3의 세계가 인간의 감성과는 동떨어진 차가운 언어처럼 느껴졌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꿈과 철학, 기다림과 약속을 발견한 시인은 기술의 언어를 시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는 기술의 비인간적 측면을 인간적 감성으로 포용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준다.


시조라는 형식은 이러한 시적 실험에 있어 중요한 전략으로 작용한다. 3장 6구, 45자 내외의 간결한 구조는 복잡한 기술 개념을 핵심적인 인간적, 철학적 본질로 정제하는 데 적합하다. 시조는 기술적 잡음을 걸러내고 그 이면에 있는 인문학적 핵심을 드러내는 ‘철학적 필터’로 기능하며, 기술의 차가운 언어에 인간적인 온기와 의미를 부여한다.


시집은 블록체인의 핵심 용어들을 시적 은유로 재탄생시킨다. ‘블록’은 ‘기억의 집’, ‘지갑’은 ‘나를 담는 그릇’, ‘탈중앙화’는 ‘중심 없는 중심’, ‘영지식증명’은 ‘증명하되 보여주지 않는다’로 표현되며, 기술의 본질에서 인간의 기억, 신뢰, 정체성, 자유, 존엄성 등 보편적인 인문학적 가치를 발견한다.


특히 ‘레이어 제로’는 분절된 블록체인 세계를 하나로 꿰는 연결자이자, 사회적 단절과 고립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염원을 담은 강력한 은유로 작용한다. 기술의 대중화는 ‘기다림의 해방’으로 표현되며, 이는 기술이 특정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광범위한 참여와 혜택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유의 확장을 의미한다.


시집은 또한 NFT, 메타버스, 생체 정보 등 디지털 자아를 탐구하며, 물리적 정체성과 디지털 정체성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자아’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삶과 감정, 윤리적 가치와 연결된 살아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천숙녀 시인은 “기술이 시가 되고, 시가 길이 되는 새로운 문학의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밝히며, 이 시집이 기술을 공부하는 이에게는 다리가 되고, 시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아카샤 - 레이어 제로, 기억의 첫 지층』은 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궁극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를 문학적 언어로 제시하는 중요한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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