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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호의 시조 아카데미 75] 이달균의 “늙은 사자”

시인 김강호 기자
입력
“제왕도 결국 자연 앞에서는 초라한 생명일 뿐이라는 준엄한 문장”

늙은 사자

 

이 달 균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늙은 사자 _ 이달균 시인

이 시조는 ‘늙은 사자’라는 한 존재의 쇠락과 죽음을 통해 권력과 생의 허망함, 그리고 죽음 앞에서 비로소 도달하는 평화와 자기 초월의 순간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사자를 단순한 동물로 묘사하지 않고 인간의 삶과 내면을 투영, 사자의 신체적 쇠락을 인간의 생애와 권력의 소멸에 겹치게 하여 긴밀하게 작동한다.

 

첫 수의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곁’이라는 말은 죽음이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 생의 바로 옆에 늘 함께하는 실존적 현실임을 암시한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에서 평원은 사자를 길러낸 세계이자 그가 군림했던 삶의 무대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에서 번개의 강렬한 이미지와 ‘덧없음’의 추상적 의미가 충돌하면서, 한때 평원을 압도했던 제왕의 위엄이 이제는 소멸을 향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수에서는 제왕의 삶과 인간적 자아의 분리가 두드러진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의 ‘제왕’은 단순히 사자의 왕이라는 뜻을 넘어, 평생 자신을 규정해 온 권력과 명예, 자존과 욕망의 무게를 뜻한다. 따라서 ‘제왕을 버린다’는 말은 왕좌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자신에게 부여했던 허위의 권위를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는 그동안의 투쟁과 분노마저 꿈처럼 허망해졌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노여움’은 약육강식의 본능인 동시에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축적해 온 분노와 경쟁으로 읽힌다.
 

이어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은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역설이다. 사자의 갈기는 권위와 힘의 상징이지만, 그 위에 나비가 내려앉음으로써 왕의 상징은 평화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나비는 가벼움과 아름다움, 동시에 짧은 생명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죽음에 가까워진 사자에게 찾아온 평화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면서, 평생 힘으로 살아온 존재가 처음으로 힘을 내려놓고 생의 다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수의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는 사자의 생을 내려다보는 초월적 시선처럼 제시된다.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면 독수리는 그 주위를 돌며 죽음과 하늘을 함께 환기한다.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에서 ‘드린다’는 표현은 죽음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자연의 순환에 돌려주는 숭고한 행위로 승화한다. 그러나 곧바로 “짓무른 발톱 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라고 함으로써 시는 숭고함을 현실의 물질성으로 끌어내린다. 제왕의 발톱 사이에 개미가 찾아온다는 것은 권력의 최종적 해체이자, 모든 생명이 결국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다는 냉정한 진실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늙은 사자’는 한 마리의 사자인 동시에 권력과 욕망 속에서 한 생을 살아온 인간의 자화상이다. 사자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제왕’을 벗어던진 뒤 도달하는 자유이며,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을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마지막 질서가 된다. 특히 ‘제왕-나비-독수리-개미’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변주는 힘의 절정에서 평화와 초월을 거쳐 미세한 생명으로 내려가는 존재의 순환을 보여 준다.

김강호 시인 

김강호 시인

1960년 전북 진안 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당신 생각 소나기로 쏟아지는 날』외 다수

2024년 44회 가람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 「초생달」 수록

코리아아트뉴스 전문기자

시인 김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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