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기행] 가장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다
필자는 지난해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에 다녀왔습니다. 화가 박수근의 예술혼을 기념하기 위해 강원특별자치도 양구군이 2001년 11월 착공해 2002년 10월 25일 개관한 미술관입니다. 부지 면적 5,600평에 연건평 208평의 2층 건물로, 총 21억 5000만 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전시실은 58평의 기념전시관과 기획전시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장고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2021년 11월에는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裸木 봄을 기다리는 나목 박수근展'을 관람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박수근의 장남 박성남 화백의 사전 검수(檢收)를 마쳤음을 미리 밝힙니다.

오늘은 국민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이야기할 때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은 좀처럼 비켜갈 수 없는 이름이다. 그의 그림에는 화려한 궁궐도, 이름난 명승지도, 시대를 호령한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를 업은 여인,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아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 허리를 굽혀 일하는 사람들, 길가에 서 있는 노인과 앙상한 나무가 있다.
그가 바라본 것은 언제나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박수근은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결코 평범하게 그리지 않았다. 가난하고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인간의 존엄과 따뜻함을 발견했다. 바로 그 때문에 박수근은 오늘날까지 ‘국민화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박수근을 한국 근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하며, 단순화된 구상과 토속적인 질감, 화강암을 연상시키는 독창적인 화면을 통해 한국적 미감과 서정성을 구현했다고 설명한다.
밀레의 그림을 바라보던 열두 살 소년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비교적 넉넉했지만 이후 가세가 기울면서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열두 살 무렵 접한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이었다. 특히 농민의 소박한 삶을 성스럽고 경건하게 표현한 밀레의 그림에 깊은 감동을 받은 박수근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훗날 그의 작품을 보면 어린 시절 밀레에게 받았던 감동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밀레가 프랑스 농민들의 노동과 삶에서 숭고함을 발견했다면, 박수근은 한국의 농촌과 시장, 골목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에게서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정규 미술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그리고 18세였던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 작품을 출품해 입선하면서 화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갔다.
가난 때문에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박수근에게 불행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기존 화단의 형식에 매이지 않는 독특한 조형언어를 구축하게 만든 배경이기도 했다. 그는 서구의 화법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자신이 보고 살아온 한국인의 삶과 풍토에서 그림의 언어를 찾아나갔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박수근의 삶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겹쳐 있다.
그는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한 뒤 평안남도청에서 근무했고 해방 후에는 미술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그의 삶 역시 송두리째 흔들렸다. 가족과 헤어진 채 남쪽으로 내려와 한때 부두 노동을 했으며, 이후 가족과 다시 만난 뒤에는 미군 부대 PX에서 군인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갔다.
화가가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시절은 생활인 박수근에게는 고단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군 PX에서 번 돈을 모아 서울 창신동에 작은 집을 마련했고, 이곳은 박수근 예술의 중요한 산실이 됐다.

창신동과 명동, 을지로를 오가던 그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스케치했다. 시장의 여인들, 행상인, 아이들, 골목길과 판잣집, 나무와 노인들이 그의 작품 속 주인공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특히 전후 시기 그가 노동하는 여성과 시장, 거리 풍경 등 서민들의 일상적인 모습을 즐겨 그렸다고 설명한다.
박수근이 바라본 전후의 대한민국은 가난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가난을 비참함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사람들은 울부짖지 않는다. 과장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말없이 앉아 있거나, 걸어가거나, 장사를 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업고 일한다. 고통을 극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그 삶을 조용히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슬픔과 따뜻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화강암 같은 그림’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박수근 회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독특한 표면에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캔버스에 여러 차례 물감을 덧칠해 만들어낸 거칠고 두터운 표면은 오래된 화강암이나 돌담, 토벽을 연상시킨다. 그 위에 검고 간결한 선으로 인물과 나무를 그려 넣었다. 갈색과 회색, 황토색, 검은색을 중심으로 한 절제된 색채 역시 특징적이다. 멀리서 보면 그의 그림은 단순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무수한 물감층과 붓질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마티에르 효과가 아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한국의 돌처럼, 박수근이 그린 사람들도 거친 시대를 견뎌낸 존재들이다. 화면의 표면과 그림 속 인간의 삶이 서로 닮아 있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박수근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두터운 표면을 한국의 토벽이나 화강암 암벽과 연결해 설명하며, 단순한 선과 평면적인 구성에는 옛 석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했던 작가의 조형 의지가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그의 독창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양의 재료인 유화를 사용했지만 그림의 정신과 질감은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서양회화를 배운 화가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어느 나라 화가와도 닮지 않은 박수근만의 회화를 탄생시켰다.
여인과 아이, 시장과 나무
박수근의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소재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인이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하는 여인, 머리에 함지를 이고 시장으로 향하는 여인, 길에서 장사를 하는 여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들은 1950~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생계를 지탱했던 평범한 어머니이자 생활인들이다. 박수근은 그들의 삶을 영웅적으로 과장하지 않았다. 다만 존재 그 자체를 묵묵히 화면에 옮겼다.
아이들도 중요한 소재다. 골목길에 모여 앉은 아이들의 모습은 가난했던 전후 풍경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박수근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존재가 나무다.

특히 잎을 모두 떨어뜨린 앙상한 나목은 그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나무는 한겨울을 견디고 있지만 죽은 나무가 아니다. 봄이 오면 다시 잎을 피울 생명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박수근의 나목은 전쟁과 가난이라는 혹독한 겨울을 견디면서 살아온 한국인들의 모습과 자주 겹쳐 읽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규모 박수근 회고전에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이러한 의미와 연결된다.
박수근의 대표작들

박수근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나무와 두 여인〉을 들 수 있다. 거대한 나목을 중심으로 두 여인이 서 있는 장면이다. 인물들의 얼굴에는 구체적인 표정이 거의 없다. 화면은 단순하고 색채도 화려하지 않지만, 나무와 사람의 관계에서 묘한 긴장과 서정성이 만들어진다.

〈절구질하는 여인〉 역시 박수근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노동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한국 농촌 여성들의 생활과 강인함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빨래터〉, 〈시장 사람들〉, 〈아기 업은 소녀〉, 〈모자〉, 〈농악〉, 〈골목 안〉, 〈유동〉, 〈노인들의 대화〉, 〈춘일〉 등에서 박수근 특유의 조형세계가 이어진다.
작품의 제목은 달라져도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다.
그것도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다.
박완서의 『나목』과 박수근
박수근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소설가 박완서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PX에서 만났다. 박수근은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젊은 박완서 역시 생계를 위해 PX에서 일했다. 박완서는 훗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장편소설 『나목』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화가의 모델이 박수근으로 알려지면서 그의 삶과 예술은 문학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바라본 시대의 풍경이 닮아 있다는 점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 폐허와 가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먹고살아야 했고 사랑하고 가족을 지켜야 했다. 박완서가 그 시대를 문장으로 기록했다면 박수근은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인정받기까지 오래 걸린 화가
오늘날 박수근의 작품은 한국 근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그의 생전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작은 창신동 집 마루에서 그림을 그렸고 작품 판매만으로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운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등에 작품을 출품했고 이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화단에서 점차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생은 길지 않았다.
말년에는 건강이 크게 악화됐고 백내장 수술 과정에서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 시련도 겪었다.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결국 백내장 수술 후 간경화로 196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적인 평가와 작품가격 상승, ‘국민화가’라는 명예는 대부분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본격적으로 찾아왔다.
박수근 그림에는 왜 얼굴이 없을까
박수근 작품 속 인물들은 대개 얼굴이 상세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눈과 코, 입을 생략하거나 최소한의 선으로 표현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특정 인물이 아닌 우리 모두의 어머니, 할머니, 이웃처럼 느껴진다. 얼굴을 지움으로써 한 개인의 초상은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확장된다.
또한 인물의 크기는 작지만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다. 거대한 나무 아래에서도, 회색빛 골목에서도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수근이 그린 것은 가난 그 자체라기보다 가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의 품격이었다.
‘서민의 화가’라는 말 너머
박수근에게는 흔히 ‘서민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평생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다. 하지만 그를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따뜻하게 그린 화가’라고만 이해하면 그의 예술적 성취의 절반만 보는 셈이다.
박수근은 매우 치밀한 조형감각을 지닌 현대화가였다.
대상을 과감하게 단순화하고 원근법을 약화시키며 인물과 배경을 평면적으로 배치했다.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독특한 표면을 만들고 색채를 극도로 절제했다. 서구 유화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한국의 돌과 벽, 석물에서 느껴지는 질감을 자신만의 회화 언어로 변환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향토적인 동시에 현대적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박수근은 단순한 풍속화가를 넘어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가가 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 되다
박수근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거창한 것을 찾아 헤매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을 그렸다. 고향의 나무와 산, 아내와 아이들, 시장의 아주머니, 골목의 아이들, 노인과 행상인, 전쟁 뒤의 서울이었다. 그리고 그 평범한 풍경을 오래 바라봤다.
그 결과 지극히 한국적인 장면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보편적인 예술로 확장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박수근에 대해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회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화가”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 속에서 아직도 살아가는 사람들
박수근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넘었다. 그가 그렸던 판잣집과 흙길, 머리에 함지를 이고 시장으로 향하던 풍경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그곳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일했던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고, 골목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이 있으며, 말없이 겨울을 견뎌낸 아버지와 이웃들이 있다.
박수근은 위대한 사건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작은 일상을 위대한 그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나무는 잎이 없어도 죽어 보이지 않는다. 빨래하는 여인의 등이 굽어 있어도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난한 골목의 아이들에게도 온기가 남아 있다.
그는 거칠고 투박한 화면 아래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숨겨놓았다.
어쩌면 ‘국민화가 박수근’이라는 이름의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모습을 가장 많이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림으로 보여준 화가. 화려하지 않아 더 오래 바라보게 되고, 말이 없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
박수근의 예술은 그렇게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평범한 삶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편집: 임만택 한국아트넷뉴스 대표
검수(檢收): 박성남 화가
작품 이미지 제공: 박수근연구소
KANN 블로그 바로가기
https://blog.naver.com/kanlimmtaik/2243881352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