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의 수필향기] 찻물을 끓이며 - 맹난자
찻물을 끓이며
맹난자
우수가 지나서일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의 감촉이 벌써 다르다. 따뜻한 기운이 방안 가득 넘친다. 이렇게 혼자 남아 있을 때, 내가 하는 일이란 주전자에 찻물부터 올리는 일이다.
가스레인지의 파란 불꽃 위에서 '따르르 쏴아'하고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한다.
'소나무 스쳐가는 바람소리' 같다고 말한 이도 있지만 잘 들어보면 그 안에서 유리구슬이라도 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얼마간 이런 소리가 계속되더니 주전자의 뚜껑이 들먹거리기 시작한다. 흥겹게 어깨춤이라도 추는 것일까.
그때 비등점을 향해 약동하고 싶은 본능처럼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내게서도 끓어오름을 느낀다.
봄인가 보다.
작은 주전자 입에서 하얀 김이 폴폴 오르기 시작한다. 점차 굵어지는 수증기를 보고 있자니 흰 깃발을 출발 신호로 하여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는 기차가 연상되는 것이다.
원고지를 앞에 놓고 그 네모 칸의 어딘가를 향해 떠나야 하는데, 서두부터 잘 풀리지 않을 때, 혹은 생각과 생각 사이의 이음새가 잘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어둠 속에서 출구를 찾듯 애꿎은 커피만을 연거푸 마셔댔다. 아무튼 찻잔을 손에 들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멍하니 있기를 얼마만큼 거듭하여 왔던가. 그저 멍하니 무념 속으로 빠져들 때가 많았다. 그런 때에는 으레 찻잔이 내 옆에 있게 마련이었다.
커피잔 위로 피어 올라오는 커피의 향기를 따라가다보면 저만치 안개 숲이 걷히고 젊은 날의 시간들이 재잘대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기억 속으로 시간의 순례를 떠나본다.
마음이 춥고 배가 고플 때에는 손에 감싸쥔 차 한 잔의 온기가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한갓 물에 지나지 않으면서 허기를 채워주고 때로는 한기寒氣마저 녹여주던 차는 물 이상의 힘을, 아니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차란 사색에 유익하다는 말처럼 그것은 역시 육체보다는 정신의 영역에 더 많이 접근되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불에서 들어낸 주전자는 '치익 치익' 하고 몇 뻔 꺾는 소리를 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억지로 한 박자를 늦춘다. 끓는 물을 붓다가 찻잔 밖으로 튀어 올라온 물 때문에 손을 데일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는 내 자신을 향해 '서둘지 마라'하고 '욕속부달欲速不達'을 뇌어본다.
도달하고자 하나 이르지 못하는 이런 증상은 능력에 비해 언제나 마음만이 앞서는 내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선지를 널찍이 펼쳐놓고 먹을 갈면서 무한이 비어 있는 여백 앞으로 다가가려는 사이, 찻물을 끓이면서 차를 마련하는 동작의 그 행간이 문득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이렇게 까닭 없이 마음이 허전하고 무료할 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혼자 차를 드는 것은 우리가 저마다 앞으로 써내려가야 할 원고지의 행간 그 어느 사이쯤에 멎어, 주변의 아름다움과 적막함과 사물의 깊이에 대해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행보行步의 쉼표 같은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나는 선반의 유리문을 열고 차 가운데서 춘설차春雪茶를 꺼내든다. 겨우내 눈[雪]을 머금고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낸 춘설차春雪茶.
거기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겨도 좋으리라. 그저 무엇 하나 쉬운 존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의 '성性'이 '검儉'이라고 말한 이가 육우陸羽였던가.
차를 마시기에 적합한 사람은 그래서 행실이 바르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라고 했나보다. 내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바이리라. 무엇보다도 나는 사람의 기운을 가라앉게 한다는 그 쓴맛과 사귀고 싶었다.
알맞게 끓인 물로 춘설차 한 잔을 우려내어 앞에 두고, 봄이 오는 길목에 앉아본다. 그냥 여백으로 족하다. 그리고 점점 무미無味한 것의 편안함이 좋아진다. 질박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드니 잔 바닥에 어리는 은은한 향기의 연둣빛이 신비롭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속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심향 단상]
커피나 차는 아주 소량으로도 우리의 삶에 큰 활력소 역할을 합니다.
차나 커피는 사색에, 정신적으로 유익한 것으로 큰 마력을 지녔음을 매번 느낍니다. 보통 하루의 일과가 시작될 때 정신 작용을 빨리 깨우고 싶어서 마시는 경우가 많지요. 또 밥을 먹은 후 식곤증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마시고요. 어쨌든 커피를 마심으로써 안개 낀 것 같은 머리와 몸이 살아있음을 빨리 느끼기 위해 마시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기 위해서, 또 마음이 추울 때도 커피를 드셨습니다. 따뜻한 커피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 손을 따라 온 몸으로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허기졌을 때는 위장을 따뜻하게 데워주어 몸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마음이 허전할 때는 차의 온기가 타인의 온기를 대신해주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것입니다. 그래서 차는 여럿이도 마시지만 혼자 마시는 시간도 소중하다 할 것입니다.
물이 끓을 때 '따르르 쏴아!'하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수증기에 의해 주전자 뚜껑이 들먹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흥겨워서 어깨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이 뽀글뽀글 끓으며 올라오는 수증기는 흰 깃발이 되어 기차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되고, 주전자물을 따를 때 ' 치익 치익 칙!' 하는, 기차가 출발할 때 나는 신호음을 내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용기가 스테인리스일 때 더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바닥이 얇아서 물이 더 빨리 크게 반응 하는 것이지요.
바닥이 얇은 용기에 물을 끓이면 빨리 끓고 또 빨리 식습니다. 반면에 용기 바닥이 두꺼운 것에 물을 끓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빨리 식지 않고 따뜻함이 오래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는데, '양은 냄비 같은 사람'이니 '뚝배기 같은 사람'이니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찻물을 스테인리스 용기에 넣고 끓입니다. 조용하던 물이 온도가 올라가면서 용기 바닥에 작은 기포를 만들며 수런수런 소리내기 시작합니다. 바닥에 있는 물부터 끓기 시작합니다. 물이 무슨 상황인지 놀라 수런대고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감에 따라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춤추듯 올라오며 소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마치 '내가 끓고 있다' 라고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바람이 세게 불 때 '쏴아!' 하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요. 끓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물방울이 커지고 소리도 세져서 '부글부글'한 소리가 요란해지면 불을 꺼야 합니다. 더 끓이면 물이 위로 튀어 올라와 넘치게 되니까요. 물은 언제 불을 꺼야 하는지, 넘치기 전에 끄라고 알람음으로 알려줍니다.
불을 끄면 물은 다시 조용해지고 기다리는 듯합니다. 용기 밖의 온도가 낮으니 점점 자신의 온도를 낮추며 거기에 맞춰갑니다. 시간이 지나며 물은 식어가고 안정을 찾습니다.
팔팔 끓는 물을 따르려고 하면 뜨거운 용기에 가까이 있는 물은 뜨거워서 '파다닥파다닥!' 튀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어선 바닥에 놓인, 잡혀온 생선이 놀라 '파닥파닥' 거리는 것처럼요. 그렇게 보면 물이 '파다닥파다닥!'하는 것은 놀라서 '앗 뜨거 앗 뜨거!' 하는 모습처럼 통통 튀어 오릅니다. 물은 불이 뜨거워서 놀랐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찻물을 끓이고 빨리 붓고 싶은 마음에 급히 따르다가 데일 뻔한 일도 겪으셨지요. 그때 자신에게 '서둘지 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이든 급하게 하려고 하면 이루지 못하고 탈이 난다는 깨달음을 주십니다.
찻물을 따르면서 바닥에 물이 조금 남았을 때 뜨거운 물방울이 표면을 구르며 유리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납니다. 또르륵 또르륵! 용기를 기울이면 따라 나오는 물방울 소리.
찻물 끓는 모습이 아름다운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책상 위에 깔판을 깔고 화선지를 펼쳐 놓고 앉아서 먹에 붓을 적신 후, 붓 끝을 가지런히 모으고 잠시 숨 한 번 들이쉬고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혹시라도 첫선에서, 첫 글자가 삐뚤어지지 않게 잘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 글자를 잘 써야 안심이 되고 자신감이 생겨서 다음 글자를 이어 쓸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이나 처음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붓의 끝은 너무나 부드러워서 정신 집중하지 않으면 선이 삐뚤어지기 부지기수입니다.
처음이 좋아야 끝도 좋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마음이 중요하여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차란 정신적 영역에서 사색에 유익한 것입니다. 커피나 차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겨 지나간 일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을 정리해 보기도 합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우리가 잠시 멈춰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분명 실수를 줄이고 계획을 좀 더 촘촘히 짤 수 있게 합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삐 걸어갈 때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멈춰 서면 보이는,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 바쁘다 보면 뒤는커녕 앞도, 옆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실수하거나 뭔가를 놓치고, 부딪히고 지나칠 수 있는데, 잠시 잠깐 멈춰서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바쁜 일상에 작은 쉴 틈 하나 마련하는 것, 그것은 춘설차 한 잔이나 커피 한 잔 마시며 잠시 쉬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영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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